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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제안순서 1-나의 생애를 변화시킨 성경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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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식일학교 작성일10-06-28 09:19 조회5,2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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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제안순서 ① 나의 생애를 변화시킨 성경 말씀

◈ 주제 : 성경말씀을 통해 생애의 대전환을 이룬 인물들의 삶을 돌아본다.

◈ 진행방법 : 각 인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

◈ 순서자료
1)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은 어렸을 때도 음악의 천재였다. 그는 9세에 영적 칸타타(Cantatas-성악곡)를 썼고, 10세에 소나타를 작곡하였다. 외과 의사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가로 자라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아들이 법률을 공부하기 원했다. 헨델은 아버지가 싫어했지만 풍금과 바이올린을 배웠고 11세에 매주 교회 예배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그의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알게 된 베를린 왕실에서 그를 초청하여 독일의 미래 왕 앞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어네스트 어거스터스 왕자는 그를 왕궁의 지원하게 이탈리아에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헨델의 아버지가 제안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헨델이 본국에서 법률을 공부하기 원했다. 실망한 헨델은 용기를 얻고자 성경을 읽었다. 그는 자녀들이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해야 한다는 에베소서 6장 1절을 읽었다. 그는 무엇을 하여야 할 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왕궁에 아버지께 순종하기 위하여 집으로 간다고 말했다. 그는 집에 와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하여 루터란 짐나지움(대학예배교육기관)에 등록했다. 그때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방과 후에 헨델은 늙으신 아버지의 방으로 급히 가서 성경을 읽어 주었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신 성경절은 예수님의 출생과 봉사와 죽음의 장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역 우연히 헨델은 요한계시록 19장 6절을 펼쳤다. 그는 아버지께서 그 절을 좋아하리라 생각하고 읽어드렸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아들아, 그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라.” 아버지가 큰 감동을 받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라.” “주…하나님…전능하신 이가…통치하시도다.” “한 번 더 읽어다오.” 노인의 눈은 반짝 빛났다. 헨델은 그 말씀을 아버지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다섯 번이나 읽어드렸다. 1697년 2월 헨델의 아버지는 75세로 죽었다. 헨델은 독일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음악가가 되었다. 1731년, 28세 되었을 때 헨델은 런던으로 이사했다. 그는 영국의 귀족들이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40개의 오페라 작품을 썼다. 그러나 변덕스런 청중들의 기호는 변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그의 오페라에 오지 않았고 헨델은 큰 부채를 지어 파산 직전에 몰렸다.

런던 언론은 그를 한물 간 사람이라고 조소하였다. 그가 어음을 갚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오른팔이 마비되는 중풍에 걸려버렸다. 독일에 돌아와서 수치료를 받아 겨우 손을 쓸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는 다시 런던에 돌아 왔는데 이번에도 채권자들이 빚을 갚지 않으면 감옥에 보내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메시야’란 주제를 지닌 가극의 가사를 가져왔다. 헨델은 가사에 단지 복음만을 사용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구약의 예언도 사용했다. 그는 많은 책들의 성경절들을 사용하였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을 특히 좋아했다. “할렐루야 주 하나님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께 그 절을 읽어드렸으며 아버지께서 그 부분을 천천히 다시 읽으라고 부탁했던 것을 기억했다. 1741년 8월 22일 토요일 헨델은 런던 집에서 책상에 앉아 공백의 오선지에 ‘메시야’란 낱말을 썼다.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하나님께 축복하여 달라고 기도했다. 몇분 내에 음악이 그의 펜에서 뛰기 시작했다. 24일간 그는 먹고 잠자는 것을 거의 잊어버렸다. 그가 ‘할렐루야 합창’ 부분을 완성하였을 때 한 종이 그 방에 들어왔는데 헨델의 눈에서 눈물이 책상 위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 파산 직전에 있던 헨델은 외쳤다. “온 하늘이 나의 앞에 열려 있는 것을 보았으며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났다.”

헨델은 메시야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처음 공연하였다. 그것은 큰 성공이었다. 그 소식은 급속히 런던으로 퍼졌다. 헨델은 인기가 있었다. 그의 오라토리오는 많은 청중을 끌어들였다. 그는 빚을 청산했다.
메시야 곡을 런던 코번트 가든에서 공연하였을 때 조지 2세 왕이 특등석에 앉아 있었다. 세 번째 할렐루야가 불릴 때 왕은 감격한 나머지 일어서서 합창이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 -나의 생애를 변화시킨 성경 말씀/론 왓치, 도로시 왓츠 저/강석규역

2) 올랜도에 있는 코렉트 그래프트 회사의 사장, 월트 멜른은 자정이 좀 지난 시간에 깨어나 미국 정부 검사관과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보트에 대한 불인가로 공장이 역경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군단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를 괴멸시킬 때 사용한 보트가 그의 작전 상륙용 주정이었다. 그의 수상 스키보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는 근래에 한 개당 거의 10만 달러 가치가 있는 보트 3,000정을 만들 것을 정부와 계약했다. 정부의 검사관은 자기의 여행 경비를 정부에서 받고 또 멜른에게 받아 두 번 지불받기를 원했다. 그는 또 일관 작업에서 통과하는 모든 보트에 대해서도 뇌물을 원했다. 월트 멜른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직한 일이므로 거절하였다. 그 결과로 검사관은 작은 것에도 꼬투리를 잡아 보트 검사 통과를 거절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계속 된다면 멜른은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어 파산할 게 뻔했다. 월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는 자기 앞에 있는 성경책을 펼치고 무릎을 꿇어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주님 내게 닥친 문제를 아십니까? 내가 어찌 하오리까? 어찌하여야 좋을지 보여 주옵소서.” 그는 눈을 뜨고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거실의 불빛이 잠언 3장 5, 6절을 밝혀 주었는데 여느 때보다 더 환하게 밝혀 주는 듯 하였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며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것이 나의 대답이다. 그 사람에게 뇌물을 주는 일을 주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단지 세상 방식을 따라가는 행동이다. 나는 그렇게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이 일을 통찰하시리라 믿습니다.”

기도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검사관이 도착하였는데 마침 이미 인정받은 보트 40척이 대차(臺車에) 실려 떠날 때였다. 그는 “그것들은 흠집이 있으니 내려라. 재검사를 받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공장은 폐쇄되어야 한다는 것을 멜른은 알고 있었다. 그는 채권자 228명에게 백만 달러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는 모든 채권자를 불러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그들은 파산 행위 11조의 보호를 청구하라고 제의했다. 공장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고용인들을 해고해야만 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법원의 파신 절차를 시작했고 그렇게 되면 결국 채권자들의 빚을 10퍼센트만 갚으면 되게 되었다. 그 나머지 빚은 대손(貸損)으로 처리되어 탕감받는 것이다.

월트 멜른은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정직한 행위, 크리스찬의 행위로서 그의 빚 100퍼센트를 다 지불하기 원했다. 그렇게 하는 데 20년이 걸렸지만 결국 빚진 것 한 푼까지도 모두 갚았다. 본래의 채권자가 죽은 경우에도 그의 상속자를 찾아서 갚았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어떤 사람이 멜른에게 글을 보냈다. “당신의 25년 전의 채무까지 갚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그 때에는 어린아이들이었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1895년 5월 1일에 이르러 빚을 5만 달러까지 낮추었다. 7월 1일, 새로운 보트 모델을 출품하기 위해서 자본이 필요했다. 그는 6월까지 그의 빚을 모두 청산할 수 있도록 주님께 간구하면서도 어떻게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막연하였다. 그 달에 코렉트 크래프트 회사는 낚시 대회에 참여하는 수상 스키 팀을 찬조하였다. 그들이 상을 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단지 보트를 선전하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 플로리다. 잭손빌 근처에서 낚시 대회가 열렸는데 그 팀이 이겼고 상금 10만 달러를 탔다. 상금의 반은 수상 스키 팀이, 나머지 반은 찬조한 회사가 받게 되었다. 월트는 마지막 빚을 청산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던 5만 달러를 얻었다. 월트 멜른은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의 길을 인도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가 파산의 그늘 속에서 방황하면서 수년을 보낼 때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모세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것이 가장 짧은 첩경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갖고 계셨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후에 ‘파산에서 구하여졌다’라는 체험의 책을 썼다. 그의 보트를 사는 모든 사람에게 보증으로 그 책 한 권씩을 선사하였다. 그와 그의 가족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에 대해 간증하였다. 그가 그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처음 한 것은 기독 병원을 위하여 5만 달러가 필요한 인도네시아 선교사들에게 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체험을 말하며 그들도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고 그때부터 2년 동안 주님께서 그들에게 10만 달러를 주셨다. 멜른 가족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여러 요양소들을 원조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간증을 듣고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심하였다.

3) 1892년 11월 23일 드와이트 L. 무디(Dwight L. Moody)와 그의 아들 윌(Will)은 나쁜 기후 때문에 독일 정기선 스프리 객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감자기 배가 암초에 부딪힌 듯한 무섭고 오란한 소리가 났다. 윌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프로펠러가 깨져서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드와이트가 옷을 입고 아들과 함께 갑판에 올라갔더니 수백 명이 불안해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선장 윌리 제로드는 그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선실로 돌아가십시오.” 이등급 선객들이 선실로 돌아가려할 때 물이 솟구쳐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였다. 정오쯤 선장은 선언하였다. “위험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배는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후 3시쯤 구조선이 도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워졌고 다른 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장 어둡고 무서운 밤을 보냈다. 아무도 잠들지 못했다.…고뇌와 불안이 너무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후에 드와이트는 말했다. 긴장한 선객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 배에서 신호탄을 쏴 올렸지만 그 도움의 신호에 응수하는 자가 없었다. 일요일 아침, 그들은 더 멀리 표류해 있었다. 두 번째 밤이 다가오자 드와이트는 선장에게 종교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들 모두-유대힌, 개신교인, 천주교인, 회의론자는 어떤 희망의 말씀을 듣기 위해 드와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고정시키려 옆의 기둥을 한 손으로 꽉 잡고 시편 91편을 읽기 시작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건지실 것임이로다…너는 밤에 놀램과…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11절이 드와이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구절을 읽을 때 그의 음성은 감동으로 가득 찼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는 하늘의 천사들이 함께 있은 것을 느꼈고 그의 마음은 폭풍 중에 평정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였다. “주님, 바다의 폭풍을 잔잔케 하여 주시고 우리의 목적지 항구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이 파도의 소요와 위급한 처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용기를 얻은 그는 시편 107편을 펼쳐서 21~31절을 읽었다. 그가 23절부터 읽어 나갈 때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저희가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성경에서 읽으신 부분을 보여 주세요.” 후에 한 여인이 물었다. 그녀는 그것을 읽고 나서 “당신이 이때를 위하여 특별히 쓰신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드와이트는 선실로 돌아와서 아내와 자녀, 친구들과 대서양 양쪽 대륙에 있는 동역자들을 떠올리면서 곧 죽음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했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 전에 읽었던 시편 91편 15, 16절을 회상했다.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그는 주님께 울부짖었다. “주님, 우리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내 그의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고 그는 평온하게 잠들었다.

“아버지! 빨리 갑판으로 올라오세요!” 그는 새벽 3시에 아들의 외침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드와이트가 윌을 따라서 갑판 위에 섰을 때 바다 위에 가물거리는 작은 빛을 보았다. 그것은 그들의 조난 신호를 본 캐나다 사람의 화물선 레이크 휴런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그들은 스프리 선의 선객 700명과 선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오고 있었다. 두 배를 밧줄로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위태로워 보였다. 밧줄이 끊어져 배와 함께 침몰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시편 91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드와이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대로 행하시고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시리라 굳게 믿었다. 후에 드와이트는 “주위에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그것이 우리의 파손된 배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우리는 퀸스타운 항구에서 기쁨의 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 경험이 있는 후에 시편 91편은 나에게 새로운 시편으로 떠올랐다.”라고 드와이트는 증언하였다. 윌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기도할 때 그와 같이 직접적인 응답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몇 년밖에 교육받지 못했던 구두 판매원 드와이트는 수천 명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선교사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성경학교 세 곳을 설립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1882~1884년, 영국에서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드와이트 라이맨 무디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강연하여 전례 없는 반응을 일으켰다. ‘캠프리지의 세븐’으로 알려지 부유하고 사회적 지위 높은 체육 선수 일곱 명이 진로를 바꾸고 이듬해에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그것이 여러 해 동안 서양의 대학생들을 선동한 학생 자원 운동의 시작이었다. 그 일곱 명 중 한 명인 C. T. 스터드는 세계 전도 십자군을 창설하여 수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1886년 드와이트는 시카고에 학교를 세웠는데 오늘날 ‘무디 성경 학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노스필드 여자 신학교와 마운트 허몬 남자 학교를 건리하였다. 그는 1899년 노스필드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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