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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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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5-22 18:21 조회4,2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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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과 천국
5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46분)

도입)
웨슬리 선생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웨슬리 선생이 기도하며 주님과 교제하다가 그만 깊이 잠이 들고 말았다. 환상 중에 그는 어느 문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도 그 문은 지옥문인 것 같았다. "똑. 똑. 똑!" 그는 물었다. "여기에 로마카톨릭신자들이 있습니까?""물론입니다." "그럼 영국 국교회 사람들은요?" "예, 있습니다.".... "장로교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도 여기에 있지요."... "그러면.. 혹 여기에 감리교인도 있을까요?" "예,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감리교인도 있습니다." 놀라움과 실망을 머금은 채 그는 발길을 돌려 위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엔 천국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그가 천국에 들어서기 전에 천국문을 지키던 수위천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와 더불어 영광스런 복음운동인 메소디스트 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얼마나 천국에 들어와 있습니까?" 천사는 "잠깐 기다리라"고 한 후 명단을 한참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감리교인은 한사람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란 웨슬리는 "아무래도 내 신앙이 잘못된 모양이지? 영광스런 칼빈의 5대 교리를 강조하던 장로교인들이 여기 다 온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럼 장로교인들은 몇 명이나 왔습니까?" 천사는 또 한참을 뒤져보더니 "미안하지만 장로교인도 없네요" 라고 대답하였다. '아니 그럼 우리의 종교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로마카톨릭교도들이 여기 다 와 있겠군'하며 그는 마지막으로 "로마 카톨릭교도들은 얼마나 들어와 있습니까?" 물었다. 그러나 천사의 대답은 마찬가지로 "한사람도 없습니다."였다. 이내 웨슬리는 큰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여기 살고 있단 말입니까?" 천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이곳에 당신이 말했던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 성령으로 난 그리스도인들만이 여기와 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크리스찬으로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각 나라, 민족, 백성, 방언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살고 있습니다." 천국은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위한 영적인 나라임을 명심하자. 천국에는 교파가 없기 때문이다.

기억절: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연구범위: 전 9:5-6, 골 1:10-14, 살전 4:13-18, 계 21:1-4, 8.

중심 사상: 우리에게 천국의 약속은 왜 그렇게도 중요한가? 천국에서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지금 천국을 맛볼 수 있는가? 천국에 가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가?

안식일 오후
많은 사람들은 천국(天國)을 옛날 동화책에나 나오는 상상의 곳으로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천국이 있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천국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이곳에서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천국이 실제적인 장소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 천국이란 그저 마음의 상태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한다. 한편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죽는 순간에 영혼이 해방되어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먼저 죽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혹은 자녀들이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머지않아 자신들도 사랑하는 이들과 만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중요한 주제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일요일(5월 24일)
우리는 언제 천국에 가는가?(요 14:1-3)

도입)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엄연히 이 땅에서도 존재한다. 천국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만이 가는 곳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곳이 천국인 것이다. 반면에 지옥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어떠한가? 바로 이웃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아비규환 지옥이요, 자기 생각에 매여 있고, 자기 가정밖에 모르며, 나만 잘 살면 되고, 내 자식만 출세하면 되고, 내가 소속된 집단만 많은 이익을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지옥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시에 가끔 일어났을 법한 보물 이야기로 천국의 가치를 가르치셨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천국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가져야 하는 보화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많이 좋아졌다. 편리해지고 깨끗해졌다. 그렇다고 천국의 가치가 희미해지면 안 될 것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곳이 천국이다. 사람이 지은 어떤 집보다도 편안한 곳이 천국이다.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흐르고 좌우에 생명나무가 열매를 맺는 천국, 다시는 고통이 없고 저주가 없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천국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 육신의 몸에서 불멸의 영혼이 분리되어 곧바로 천국에 올라간다는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편만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사단은 에덴에서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1. 다음 구절들은 죽음의 참된 본질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왕상 11:21, 시 13:3, 전 9:5-6, 고전 15:51)
답:
우리는 죽을 때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는데, 성경은 이것을 잠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한 채 부활의 아침을 기다린다. 비로소 그 때에 구속받은 허다한 무리가 천국에 들어가, 에녹과 엘리야와 같은 먼저 천국에 가 있는 이들과 만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죽음으로 눈을 감는 순간, 그 다음에 보게 될 광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3,000년에 죽었거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날 죽었거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죽음의 순간에 눈을 감고, 그 다음에 인식하는 일은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러 재림하시는 광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그 기간은 순간처럼 느껴질 것이다.

2. 우리가 천국에 들어간 이후에 펼쳐질 미래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일까요?(요 14:1-3, 살전 4:13-18)
답:
"신약에서 복스러운 소망의 초점은 결코 개인의 죽음에 있지 아니하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재림의 때에 있을 성도의 부활과 변화에 있다. 성도가 얻게 될 위안은 죽음의 순간이 아닌, 이와 같은 미래에 있는 것이다."(노먼 걸리,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리뷰 앤드 헤럴드 출판사, 293-294)

교훈: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몸에서 분리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죽은 후에 무의식 상태로 있다가 재림의 아침에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간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 성도들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셨다. 창 47:29-30에 야곱이 그의 일생을 마칠 때쯤 고백하기를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이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 요셉이 가로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분명히 요셉은 그 아버지를 장사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버지는 죽음이라 표현하지 않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이런 고백을 한 것이다. 욥 7:21절에 욥의 고백은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라고 했다. 단 12:2절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다. 다니엘도 보면 죽음을 표현할 때 자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예수님께서도 이 죽음을 죽음으로 보지 않고 잠 자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막 5:39절에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잔다“ 고 하셨다. 요 11장에서도 나사로가 죽었는데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내가 그를 깨우러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이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 것은 바로 성도의 죽음에는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모든 영혼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 모두 깨어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월요일(5월 25일)
천국인가, 지옥인가?(마 25:46)

도입)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천국이 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지옥이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구원이 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심판을 받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고 했는데 인자가 계시지 않는 곳, 예수님이 환영받지 않는 곳, 예수님을 믿지 않는 곳,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에는 이미 심판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심판을 느낄 때가 있지 않는가? 버림받은 것 같은 마음, 내 죄, 내 허물이 그냥 죄의식으로만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고, 가족들에게도 버림받았고, 하나님에게도 당연히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바로 우리가 심판을 느끼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버림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가? 병, 플라스틱, 신문, 그리고 음식 찌꺼기, 보통 쓰레기를 나누어서 분리수거를 하는데 옛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는 쓰레기를 성 밖에 모아서 불태웠고 그 불태우는 곳을 게헨나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옥을 게헨나라고 부르셨다. 그러니까 지옥은 버림받은 곳이다. 쓰레기를 버려서 소각한 것처럼 지옥도 결국은 버림받은 영혼들을 모아 놓는 곳인데 이것은 영원한 버림받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옥은 바로 그리스도의 버림을 받은 그곳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 될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누군가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한 부류는 '주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자들이고, 다른 부류는, '내가 너의 선택을 존중하노라. 너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자들이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창조된 것은 우리의 동의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다. 만약 우리가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이다.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1. 모든 사람은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운명이란 무엇입니까?(마 25:46, 요 5:29, 계 21:1-4, 8)
답:
천국은 실재하는 곳이다. 그곳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더불어 사시는 곳이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 편에 머물기만 하면 살게 될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첫째 부활에 참여한 성도는 주님을 따라 천국으로 갈 것이며, 그곳에서 1,000년 동안 있게 될 것이다(계 20:4-6). 그 후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에 구원받은 자들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나 지옥도 실제이다. 흔히 지옥을 죄인들이 영원토록 고문당하고 불태움 받는 곳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한편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개념도 성경에서 벗어난 가르침이다. 구원의 복음을 거절한 자들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며,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구원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멸망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은 우리의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 천국은 우리의 것이다.

교훈: 천국과 지옥은 모두 실제이며, 우리는 자신의 믿음에 따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누릴 수도 있고, 정죄를 받아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도 있다.

부가적용)
지옥이나 심판, 불행, 미움은 결국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로 귀결된다.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문제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해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서 우리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과 우리의 공평의 개념은 다르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공평대로 대우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 다 망해야 마땅하다. 긍휼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 안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가 없는 사람이 없다. 죄가 없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내 자신도 죄인이 아니었던 때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은 상태가 어떤가를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도 없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마음에 근심도, 미움도, 질투도 없고, 내 마음에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상태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알고자 한다. 예수님을 알고자 하고 닮고자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죄가 없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히 신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른 면이 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이미 더러워진 존재이기 때문에 한 번도 더러워지지 않은 순결한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은 저렇게 기뻐하실 수 있을까, 어떻게 늘 사랑을 실천하실 수 있을까, 하나님과 가까울 수 있을까, 참 신기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예수님과 가까워진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에 대한 그 근본적인 경외심은 결코 벗어버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가까워져도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면류관을 쓰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경외심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화요일(5월 26일)
하나님의 왕국-지금과 그때(눅 17:21)

도입)
예수님의 이적과 천국을 같이 연결시켜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아주 핵심적인 성경구절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신학자들이 천국의 신학을 예수님의 이적, 예수님의 능력에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구절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민망해서, 불쌍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고, 또 당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신 것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천국이 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 그러므로 하나님이 임금-King으로 다스리는 곳이 천국이다. 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이 임금으로 다스리시는 곳에서 우리는 천국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을 임금으로서 다스리신다면 가정이 천국이 되는 것이고, 내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내 삶을 다스리신다면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의 능력이 임하셔서 병이 떠나가고, 귀신이 떠나가고, 가난이 떠나가고, 문제가 해결되고,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천국이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천국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된다. 비록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음의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죄의 결과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영생을 받았다. 우리는 이 귀중한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졌다. 그리스도께 충성하기로 선언한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요일 3:2). 예수께서 선언하셨듯이, 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삶에 체현(體現)함으로써 그분의 왕국의 시민이 되었다. 그들은 이제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되었으며, 더 이상 세상 사물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영원한 성을 바라본다.

1.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 이미 이 세상에서도 그 왕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말씀하셨으며(눅 17:21, 요 14:27),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어떻게 묘사했습니까?(롬 14:17, 골 1:10-14)
답:
우리는 이 땅에서도 하늘 왕국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올 왕국을 더욱 갈망하게 하는 '맛보기'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그분의 영광중에 오실 때,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실 것이다(마 25:32).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할 것이다(마 25:34).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다려오던 순간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우리는 본향에 이를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친구와의 교제보다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과의 친교가 더 낫다. 이 땅의 가장 훌륭한 왕궁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우리 주께서 예비하신 하늘 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고 세상에서 듣는 어떤 칭찬의 말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실한 종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하시는 말씀이 더욱 낫다.”(실물교훈, 374)

교훈: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그분께 충성을 바치기로 한 자들은 그분의 영원한 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이 땅에서도 이미 그 왕국의 시민임을 기억해야 한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우리 가운데 시작이 되었다. 그 나라의 영토는 더 이상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니라 왕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런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이라고 부른다. 나라이면서 동시에 백성이다. 그의 나라는 왕의 통치가 실현되는 세상의 모든 영역이다. 그 나라는 공부를 많이 해서 깨달아 가는 나라가 아니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여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다.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다. 천국은 사람들이 노력하여 만들어가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임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신데 그 생명이 싫다고 떠나버린 사람은 곧 생명을 떠난 것이다. 나무가 뿌리 채 뽑히면 잠시 살아있는 것 같지만 그저 자기 속에 있는 것으로 살다가 곧 죽고 마는 것처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육신으로는 살아있고 또 살아가지만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곧 죽을 인생이고 아니 영원히 죽을 인생일 뿐임을 모르고 살고 있을 뿐이다. 예수를 믿어야 그 나라에 들어간다. 그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현세에 주 안에서 경험하는 나라이다. 우리의 생이 다한 후에 죽어서 들어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먼저 이 땅에서 예수를 믿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가 우리에게 왕으로 오셔서 나를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그를 내 마음에 그리고 내 삶의 전 영역에 모셔 들이는 삶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한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 왕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7)하였다.

수요일(5월 27일)
우리의 기대를 훨씬 능가함(마 22:23-28)

도입)
마지막 심판 이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갈망해 왔던 삶을 충만하게 만끽하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이 나라를 단순히 "천국"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실제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훨씬 더 풍성한 그림을 그려 준다. 성경은 완전히 새로워질 우주를 약속한다. 이 우주는 하나님이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며(사66:22) 아주 풍요롭고 좋고 새로워서 죽음, 고통, 슬픔, 고난 같은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것이다(사65:17). 그 곳은 하늘과 땅이 함께 만나는 곳이 될 것이다(계21:2). 또 하나님의 보좌에서 한 음성이 나서 이렇게 선포할 것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천국과 새 땅에서의 삶은 어떤 것일지 궁금해 했던 적은 없는가? 우리는 서로를 알아 볼 것인가? 우리는 영원한 젊음을 간직할 것인가?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각자에게 할 일이 주어질 것인가? 아니면 오로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만 부를 것인가? 우리는 우주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상에서의 경험은 얼마나 기억날 것인가? 이런 궁금증을 가진 자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1. 사두개인들은 천국에서의 삶에 관해 무엇을 궁금해 했으며(마 22:23-28), 예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29-30절)
답:
마태복음 22장에는 예수께서 사두개인들과 가지셨던 논쟁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다. 사두개인들은 유대인 지도계층에 속한 무리 중 하나로서, 육체의 부활을 부인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삶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자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이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셨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은 그분의 기억 속에 보존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의 삶에서 가졌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부활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물론 다른 점도 많이 있을 것이다.

2. 새롭게 된 땅에서 우리가 더 이상 경험하지 않을 것들로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계 21:1, 4, 22-27, 22:5)
답:
해변에서 휴가를 즐기기 좋아하는 이들은 바다가 더 이상 없다는 말에 실망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바다는 하나의 위협적인 대상이었다. 이스라엘은 배를 타는 민족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바다를 무서워했다. 복음서에도 나오지만,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는 것조차도 두려워했다. 계시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세상에는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이 제거될 것이며,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교훈: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죄와 죽음이 없겠고, 슬픔의 그림자도 없을 것이다.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부가적용)
하나님은 하늘을 새롭게 하시는 것은 물론 땅에 속한 만물, 즉 땅과 그 안에 거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벧후3:13; 계21:1). 새로워진 땅에서 살게 될 사람들은 결코 늙거나 쇠약해지거나 병들지 않는 새롭고 영화로운 몸을 갖게 될 것이다. 죄의 저주가 없어져 온 우주가 "심히" 좋았던 원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창1:30). 새로워진 하늘과 땅에서의 삶은 지금 이 땅의 삶 속에 있는 여러 좋은 것들을 포함하되 모든 것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먹고 마실 것이다(눅22:18). 그리고 계시록에서 하늘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확실히 음악이 주목을 끈다. 음악과 그 밖의 예술 활동은 탁월하게 이루어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다. 하늘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는 곳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매우 명백히 드러나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부합되도록 움직이는 곳일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더 이상 "어그러진" 상태가 아니며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대로 움직일 것이다. 고통이나 슬픔, 비통이나 비극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우리는 영원히 "그 영광 앞에서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될 것이다(유24; 롬8:18; 살전2:12).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라는 사실이다(계22:4).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우주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선하고 의롭고 소망스러운 모든 것이 성취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껏 가진 모든 소망(완전한 사랑, 평안, 소망, 진리와 정의, 거룩함과 지혜, 선함과 능력 , 영광과 아름다움을 알고 싶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시16:11)

목요일(5월 28일)
하늘에서 주님을 만남(살전 4:16-17)

도입)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였고,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보좌를 보았다. 천국은 완전한 통치의 영역이며 또한 모든 복락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곳이고, 영원한 안전이 보장된 곳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라며 제자들이 올리는 기도의 여러 성취 가운데 하나로,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우주적인 법칙이 되는 장소임을 암시해주고 있다. 천국은 그 복된 통치자의 은혜가 넘치고 그에게 순복하는 심령 속에 지복(至福)이 가득하며, 모든 천국의 거주자들의 마음에 평온이 깃드는 곳이다. 우리 주님은 그곳을 가리켜 “아버지 집”(요 14:2)이라고 불렀는데, 아버지 집이란 곧 자녀들의 가정을 가리킨다. “가정(Home)”은 영어 표현 가운데 매우 애정이 가는 단어 중 하나이다. 하루 일과를 마칠 때 우리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가정을 향하게 된다. 바늘이 늘 극점을 향하듯 밤이 되면 우리 마음도 집으로 향하게 된다. 집안 식구들이 그곳에 있다.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이해해주고,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섬겨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가족이다. 냉혹한 세상에서 힘겹게 싸운 후,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의 모든 날의 소음과 먼지를 다 통과하는 그 때, 천국은 신자들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천국의 영광, 그 자체보다는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고후 5:8)이 우리의 진정한 평안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알고 지내던 이들을 새 땅에서도 알아 볼 것이라는 많은 증거가 있다. 우리의 부활의 몸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비슷할 것이다. 그분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전에 그분과 함께 있던 자들은 그분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사별했던 사랑하는 이들과 다시 만날 때 그 기쁨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경험은 주님을 만나는 일일 것이다. “후일 주를 대면하여 만날 때가 오리니”라는 찬미가 실현될 것이다. 우주의 창조주와 구속주 앞에 서는 일은 얼마나 큰 특권이겠는가!

1. 우리는 만주의 주를 만날 것이라는 어떤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까?(살전 4:16-17, 계 21:22-23)
답:
우리는 우리 구주를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일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던지고 싶어 할 것인가!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된 "왜"로 시작하는 수많은 질문들이 마침내 명확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상 생애 동안 왜 그런 시련과 유혹을 허락하셨는지 마침내 이해할 것이다. 결코 다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는지 이해하게 될 때에 모든 불신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어떻게 온갖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는지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2. 영원한 삶을 사는 동안에 무엇이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까?(롬 14:11, 딤전 1:17, 계 5:13)
답:
우리는 영원토록 만왕의 왕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인데, 그 까닭은 그분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온 우주의 창조자시며 심판자이신 그분께서 인류를 향한 사랑 때문에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스스로를 낮추셨다는 것은 영원히 우주의 경이와 존경을 자아낼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51-652)

교훈: 우리는 천국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감격스런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을 만나 뵐 것이다.

부가적용)
'천국의 사냥개'! 매우 인상적인 이 표현은 프랜시스 톰슨이 그의 시에서 쓴 표현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궁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
한순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질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 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함으로,
두드린다 - 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내가 네게서 가지고 간 모든 것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는 것이라...
일어나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프랜시스 톰슨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저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그분을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단한 연인'의 추적 때문인 것일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나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쫓아오셔서 사랑하셨던 그분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일 것인가? 오 그날이여~! 속히 오라~!

금요일 (5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제42장 '대쟁투의 종막'(662-678), 살아남는 이들, 제64장 '둘째 부활'(418-420), 제65장 '그리스도의 대관식'(421-426), 제66장 '둘째 사망'(427-429), 제67장 '새 땅'(430-433).
“악인들을 태우는 불은 세상을 정결하게 한다. 저주의 흔적이 다 사라졌다. 구속을 받은 자들에게 죄의 무서운 결과를 기억나게 하는 영원한 지옥불은 없다. 단 하나의 흔적이 남는다. 곧 우리 구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흔적만이 언제까지나 남는다. 구주의 상한 머리와 손과 발에 죄악이 저지른 참혹한 흔적은 남아 있다.”(살아남는 이들, 43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예수님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들의 구원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예수께서 모든 인류, 심지어 그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의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지 않으셨음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2. 성경은 죽음을 잠과 같은 무의식 상태로 묘사합니다. 그렇다면 빈사(瀕死) 상태에서 현란한 빛 가운데 하늘의 존재들이나 사별한 친구나 친척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이 실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그들이 본 것이 실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시킬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짧은 경험을 훨씬 초월하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늘 왕국의 시민들이다. 이 왕국은 현재와 미래에 함께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영생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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