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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삶과 죽음의 문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1/17/15(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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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1-06 09:09 조회5,8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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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9분

 

기억절 :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연구 범위 : 마 5:21~30, 잠 6:21, 7:3, 잠 6:23, 7:2, 잠 6:24, 잠 6:30~31, 잠 7:26~27.

 

엄마는 두 형제를 집에 두고 외출하면서 방금 구운 케이크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형제의 다짐을 받기 위해 말을 안 들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선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형제는 케이크를 먹어치우기로 결심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설마 엄마가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 맛있게 먹자고!”

그러나 잠언 속의 스승이 다루는 문제는 정말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어조는 강경하고 때로는 직설적이다. 물론 예수님도 영원한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셨다(마 5:21~30).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운명이 현재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타난 강한 어조의 긴박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궁극적인 생존에 필요함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알려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영감의 기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수용하고 더욱 그분의 뜻을 알기를 갈망한다.

 

A. 

❷ 잠언에서 율법을 항상 목과 손가락에 매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생명이 되고 행동이 되라는 의미이다. 

❸ 율법을 생명의 등불로 여기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요?

※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이다.

❹ 우리가 율법의 원칙을 삶 속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B. 

❷ 온갖 죄를 저지르는 죄인보다 은밀한 죄 하나를 품고 있는 신앙인이 더 위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것을 회개하고 고치기보다는 정당화 합리화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❸ 죄에 빠진 사람을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나 그물에 걸린 새 또는 음녀에게 사로잡힌 남자로 비유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죄에 빠지면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이성의 역할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❹ 치명적인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각자 어떤 영적인 결심이 필요할까요?

※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분의 삶의 원칙들을 애정을 다해 가르치십니다.

 

 

첫째날(일) 1월 11일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법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6:21, 7:3).

 

1. 잠 6:21과 7:3을 읽어 보라.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해야 할지에 관하여 이 본문에서 사용하는 신체 용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잠6:21]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잠7:3]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

 

답: 이런 신체를 나타내는 용어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간이라도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앞선 과에서 보았듯이 잠언에서 마음은 감정과 사고의 자리이다. 율법을 우리 마음에 매라는 스승의 말은(잠 6:21) 항상 율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율법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해도 되는 순간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잠 7:7). 심지어 스승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셨던 것처럼(출 24:12) 율법이 마음판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잠 7:3).

율법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율법이 단지 우리에게 부과된 외적인 규범이 아니라는 뜻이다. 율법은 우리의 동기와 은밀한 목적을 관통해서 내적 자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는 바울이 약속했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이 우리의 삶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다.

율법을 목에 매라는 말씀은 율법을 가까이 두라는 뜻이다. 고대의 백성들은 귀중품을 목에 둘러매곤 했다. 목은 호흡과 생명이 가능하도록 허파까지 이어진 공기의 이동 경로로서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페쉬(영혼)’가 ‘목’과 ‘호흡’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율법을 손가락에 매라는 말씀은 율법을 행위의 영역으로 가져가라는 뜻이다. 스승은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행위들을 암시하기 위해 손가락을 강조한다. 율법은 어떤 큰 결정뿐 아니라 작은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눅 16:10 참고).

성경에서 사용된 이런 신체 용어들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는 이 표현들이 문자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유대인들이 이마와 손가락에 매는 ‘테필린’, 기독교인들이 목에 거는 십자가, 무슬림(또는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에 두르는 묵주가 있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는 유대적 사고방식을 동원하여 신체 용어들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있다. 마음과 목과 손가락이 각각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의 심장이며 생명이며 생활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임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법조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한 사람들의 인격이며 성질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법으로 제정되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지켜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그 형상을 나타내는 생활을 조문으로 적으면 하나님의 계명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교과는 이런 사실을 신체와 관련한 표현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교훈 : 우리는 귀중품을 목과 손가락에 매는 것처럼 율법을 삶의 중요한 원칙으로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생활과 행동 속에서 그 의미를 간직해야 한다.

 

 

둘째날(월) 1월 12일 빛과 생명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 6:23, 잠 7:2).

 

1. 잠 6:23을 읽어 보라. 어떻게 율법이 ‘빛’과 관련이 있는가?

[잠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답: 율법은 생명의 길을 밝혀주는 빛이요 등불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율법은 빛으로 비유되어 왔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히브리식 사고방식에서 ‘율법’의 개념과 ‘빛’의 개념은 서로 관련이 깊다. 등불이 우리가 갈 길을 비춰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가 경로를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간혹 변명과 개인적인 편의가 율법을 무시하도록 우리를 유혹하지만 율법은 우리가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깨닫게 한다.

 

2.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었지만 그것(율법)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 믿음을 지키기로 한 그들의 결심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잘못된 것처럼 보였는가?

 

답: 요셉은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도 있다. 그들은 풀무 불을 택했고 다니엘은 사자굴을 택했다. 세상이 볼 때에 어리석게 여겼을 것이다. 많은 순교자들도 있다. 

 

3. 잠 6:23과 함께 7:2을 읽어 보라. 율법은 왜 생명과 관련이 있는가?

[잠6:23]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잠7:2]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답: 율법이 생명의 길로 안내하는 빛이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에 우리는 율법에서 영생의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과 그것이 제시하는 원칙들에 대한 순종은 여전히 삶과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마 19:17, 계 14:12). 우리는 하나님이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4)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한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과 관련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진정한 신앙을 제시한다. 즉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듯이 현재의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율법은 사람이 제정한 법률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생명은 빛이다.(요1:4) 생명은 생명의 길이 있는 것은 생명의 본성이다. 그 생명의 길 처음 창조한 사람에게는 생명과와 기타 과일들은 먹지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명령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생명관리법으로 주신 것이다. 생명을 올바르게 관리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피조물인 아담에게 먹어라 먹지 말라고 한 명령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사람에게 주신 생명을 올바르게 관리함으로 그 생명을 잃어버리지 말하고 주신 생명관리법으로서 생명의 도(행7:38)였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그것은 조문으로 제시하시면 언약의 열 말씀들이라고 했다.(출34:28 원문) 우리가 쉽게 말하는 십계명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도였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한 사람들이 그 생명을 올바로 관리하는 것은 이 생명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다.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릴 때 안전한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길이 이 생명의 도인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율법을 우리 삶의 길을 밝혀주는 빛과 등불로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해야 한다.

 

 

셋째날(화) 1월 13일 유혹과의 싸움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4).

 

앞서 보았듯이 잠 6:23의 기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빛과 생명을 하나님의 율법에 직결시킨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빛과 생명의 법이 어떻게 우리에게 강력한 영적 보호를 제공하는지 확실한 실례를 보여준다.

 

1. 잠 6:24은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명백한 것 이외에 어떤 미세한 경고를 포함하는가?

[잠6:24] 이것이 너를 지켜서 악한 계집에게, 이방 계집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

 

답: 명백한 경고는 가정을 지키고 아내와 올바른 사랑의 관계로 살아가라는 것이고, 미세한 경고는 음녀로 상징된 그릇된 교회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신앙인이 시험을 받을 때 가장 큰 유혹거리는 그 죄악을 정당화시킬 신앙적 이유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용하여 잘못된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것은 끔찍한 신성모독의 형태일 뿐 아니라 엄청난 기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말하면 그대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이런 일은 간음의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내가 함께해야 할 사람임을 보여주셨다.” 만약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라면 누가 무엇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을 단념시킬 수 있겠는가?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유혹자의 신체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그는 비위를 맞추는 말로 상대를 함정으로 유인한다. 남녀들이 간사하고 매혹적인 말, 심지어 신앙적인 언어로 장식된 말을 듣고 타협하는 상황에 이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잠언의 기자는 이런 속임수에 대해 경고하고 싶은 것이다.

율법은 이렇게 “혀로 호리는 말”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이다. 오직 율법의 명령과 순종의 의무만이 우리로 하여금 너무도 진실 되고 아름답게 들리는 유혹의 언어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유혹자는 그대의 용모뿐 아니라 지혜와 현명함을 보고 자신의 영적 필요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이없고 위험천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를 정당화시키려 할 것이다.

 

<부가설명> 교인들은 정말 때때로 신앙적인 언어로 자기의 그릇된 길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묘한 재주를 발휘한다. 그것은 사단에게서 오는 것이다. 태초에 사단은 그런 달콤한 말로 여자를 유혹하였다. 오늘날도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그릇된 주장을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표현한다. 우리가 말씀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또 기록하였으되”를 알아야 한다. 성경을 주신 목적과 그 목적을 위하여 말씀하신 전체적인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모두 거짓의 아비에게서 온 것이다. 아무리 그를 듯해도 귀를 기울이면 안 된다. 그것들을 분별하여 그릇 가지 않도록 지키는 튼튼한 울타리가 하나님의 계명이다. 일점일획이라도 변할 수 없다고 하신 그 계명은 우리의 생명의 길이다. 

 

교훈 : 우리가 신체적인 유혹뿐 아니라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신앙의 언어로 위장된 유혹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

 

 

넷째날(수) 1월 14일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잠 6:30~31).

 

잠언의 기자는 간음에 대해 경고한 뒤에(잠 6:24~29) 도둑질에 대해 말한다(30~31절). 간음과 도둑질에 대한 두 계명의 관계는 어떻게 한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 다른 계명에 대한 순종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법을 취사선택하는 타협의 태도는 완전히 율법을 어기는 생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악덕의 요새는 버림받은 죄인이나 비열한 부랑자의 사악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표면으로는 덕이 있고 존경할 만하고 고상하게 보이지만 생애 가운데 한 가지 죄를 품고 한 가지 악덕에 빠져 있는 사람의 생활이다.… 인생과 진리와 명예에 대한 높은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중 하나를 고의로 범하는 자는 자기가 받은 고상한 은사들을 죄를 범하게 하는 유혹거리가 되게 한다”(교육, 150).

 

1. 잠 6:30~3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궁핍한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잠6:30,31] 도적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적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치는 아니하려니와 31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어 주게 되리라.

 

답: 동정할만하지만 가난이 도둑질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가난과 궁핍이 도둑질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도둑질은 그가 주릴지라도 죄가 된다(30절). 물론 굶주린 도둑은 멸시를 받지는 않겠지만 그가 훔친 것의 일곱 배를 갚아야 한다. 이는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 성경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들이 생존을 위해 절도로 내몰리지 않는다(신 15:7~8).

흥미롭게도 주제가 간음에서 절도로 갔다가 다시 간음으로 돌아온다(잠 6:32~35). 두 죄악은 정말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을 불법적으로 취한다.

하지만 절도와 간음의 중대한 차이점은 절도죄가 단지 사물의 손실에 관한 것인 반면 간음죄는 훨씬 중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훔친 물건은 보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간음의 경우에는, 특히 어린이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피해가 절도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부가설명> 저자의 표현대로 간음이나 도둑질은 자기의 필요나 쾌락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한다는 사실이 동일하다. 사실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은 나의 만족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을 크게 표현한 것이 5~10계명의 내용이다. 아주 작게는 별 것 아닌 거짓말이나 거짓 몸짓도 결국 같은 범주에 속하게 된다. 성도는 생명의 정로로만 걸어가야 한다. 기차가 철로 위로만 달려야 하는 것과 같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생이 걸어갈 마땅한 길을 걷고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원칙을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보상할 수 없는 해를 끼치는 것은 더욱더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인 간음 등은 결코 보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런데 말로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도 보상할 수 없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교훈 : 우리는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특히 성적 가해는 다른 것으로 보상할 수 없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섯째날(목) 1월 15일 죽음의 위협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잠 7:22).

 

대부분의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을 염두에 두는데 보통 그것은 죄로 인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만족과 쾌락이다. 심지어 대중문화는 종종 간음과 죄악을 찬양하기까지 한다. 반면 잠언은 죄를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나중에 바울은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했다.

 

1. 잠 7:22~23을 읽어 보라. 무엇이 간음을 행하는 자로 하여금 죽음의 위협에 취약하게 하는가?

[잠7:22,23]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23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

 

답: 일시적인 쾌락의 생각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 쾌락에 빠지는 것이 이성도 마비시키고 생명도 위험에 처하게 한다.

 

‘그를 따라가는’ 자는 자신의 개성과 의지를 잃은 자로 묘사된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 “곧”이라는 말은 그가 자신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와 벌을 받기 위해 매인 미련한 자와 그물에 잡히는 새에 비유되었다. 그것들은 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 잠 7:26~27을 읽어 보라. 방탕한 여인이 그토록 치명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잠7:26,27] 대저 그가 많은 사람을 상하여 엎드러지게 하였나니 그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니라 27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

 

답: 사람을 상하여서 엎드러지게 하고 죽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여인은 단순한 간부(奸婦)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지혜와 정반대의 가치를 대변한다. 솔로몬은 이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모든 형태의 죄악을 경고한다. 이 여자는 단지 상해를 입힐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힘은 강인한 남자들도 죽일 만큼 강력하다. 그녀는 매우 치명적인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 앞에 있었던 다른 남자들, 심지어 우리보다 강인한 자들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들은 잠언의 저자가 보편적인 인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스올’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옥’이 아니라 무덤을 가리킨다.)

요컨대 죄는 그것이 간음이든 다른 무엇이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에게 주기를 바라시는 영생의 정반대 즉 멸망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이 과의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잠언의 어조는 강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성경이 말하는 음녀는 일차적으로 일반적인 세상의 창녀를 가리킨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경이 계시한 음녀를 가리킨다. 계시록 17장에는 붉은 빛 짐승을 타고 화려하게 장식한 음녀에 대한 계시가 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창녀를 따라가는 것은 사망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 된다. 그처럼 성도가 계시록 17장의 음녀를 따라가면 역시 영원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된다. 계시록 14장에는 144,000인이 여자로더불어 더럽히지 않은 자로 계시되어 있다. 계시록에 여자가 셋이 나오는데, 2장에 거짓선지자 이세벨과 12장에 해를 옷 입은 여자와 17장에 붉은 빛 짐승을 탄 음녀이다. 2장의 이세벨과 17장의 음녀는 동일한 존재이다. 이 여자들은 음녀이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144,000인은 이들에게 더럽힘을 받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에게 더럽혀지면 무너지게 되고 그들이 받을 죄에 참여하게 된다.(계18:4) 우리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결코 음녀를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간음의 유혹에 이끌려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죄악이 내포하는 치명적인 위험과 심각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날(금) 1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자기에게 최상권을 준다면 세상의 나라들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 하늘을 잃어버린다. 죄를 짓기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고, 속이는 것보다 궁핍해지는 것이 더 낫고, 거짓말하기보다 굶는 것이 더 낫다”(교회증언 4권, 495).

 

“죄로 영혼을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류의 고난일지라도 궁핍과 비난, 친구들과의 분리를 택하라. 불명예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개혁자라고 공언하며 가장 엄숙하고 순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한 백성으로서 우리는 표준을 현시대에 있는 것보다 더 높여야 한다”(교회증언 5권, 14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하면 우리가 광신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죄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동시에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 복음을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진리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을 주장하게 할 때에 이 두 극단은 자연히 해결된다. 

 

➋ 출 20:1~17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십계명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한 계명을 공공연히 어기면 다른 계명들도 범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약 2:11 참고) 우리는 한 계명에 대한 위반이 다른 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이어지는 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➌ 사람들이 신앙을 빌미로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우리가 ‘사랑’을 선악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을 구실로 저지르는 모든 악행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이 죄로 이끌리기 쉬운 사람들(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을 계속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계명이 생명의 도(生命의 道)가 되면 이런 합리화와 정당화는 하지 않게 되고 생명의 도는 보호와 생활이 된다.

 

➍ 우리는 어떻게 성경의 상징을 실재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간음’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습니까? 어떤 전통들이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영적 진리 대신 다른 것으로 곡해될 수 있을까요?

※ 오랜 교회 문화와 습관과 관행들이 상징을 실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상징과 실재를 구별하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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