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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로마서 7장의 사람은 누구인가?(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1/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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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11-17 16:37 조회5,327회 댓글0건

본문

11월 25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6분

 

연구 범위 : 롬 7장

 

기억절 :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개역).

 

로마서 7장의 문제에 관하여 재림교 성경주석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4~15절의 의미는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문제들 중 하나였다. 주된 질문은 그런 격렬한 도덕적 투쟁에 대한 묘사가 자서전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구절은 바울의 회심 이전, 이후 중 어느 때의 경험을 언급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뜻이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바울은 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인 투쟁에 대해 말한 것 같다(롬 7:7~11, 정로의 계단, 19, 교회증언 3권, 475 참조). 또한 그가 율법의 거룩한 요구에 직면하여 의식이 깨어난 자들이 경험하는 일반적인 투쟁을 묘사한 것도 사실이다”(재림교 성경주석 11권, 666).

성경 연구자들 사이에는 로마서 7장이 바울의 회심 이전의 경험인지, 이후의 경험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설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에게 성화, 죄에 대한 승리 그리고 “그 아들의 형상”(롬 8:29)으로 변화될 것을 약속하신다는 사실이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율법과 죄와 죽음에 얽매인 신분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이동하라는 부르심을 깨닫는다.

느끼기 :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누리며 그 같은 연합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기뻐한다.

행하기 :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불가능했던 삶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드린다.

 

➋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착하게 살고 싶지만 자꾸 실수와 오류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 아래 끌고 가기 때문이다. 

➌ 율법이 우리의 남편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잘 살도록 얼마나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 날마다 우리의 허물을 지적하여 고치라고 할 뿐이다. 

➍ 예수님이 우리의 남편이라면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 허물을 사유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생명의 능력으로 이기게 하신다. 

➎ 우리가 의를 행할 능력이 없을지라도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활을 주장하게 될 때에 승리할 수 있다.

➏ 우리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매일 맡길 수 있을까요?

※ 생애의 매 순간마다 예수님 편에 자신을 두도록 결정하는 것이다.

 

결론 : 로마서 7장은 6장에서 설명한 두 가지의 대조적인 현실을 확장하여 우리 각 사람의 삶 속에 법/죄/죽음과 그리스도/성령/순종/생명이라는 두 경험 사이의 투쟁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일) 11월 19일 율법에 대해 죽음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

 

롬 7:1~6을 읽어 보라. 바울은 독자들로 하여금 율법과 맺고 있는 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어떤 예증을 사용하는가? 그 예증을 통해 제시하려는 요점은 무엇인가?

[롬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답: 남편이 죽은 후에 재혼해도 되는 사실을 예로 들어 율법에 죽고 예수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롬 7:1~6에서 사용된 예증이 문맥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바울의 논리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본문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서신 전체에서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예배 제도를 다루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제도가 메시아의 도래로 종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대인 신자 역시 그들의 삶에서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다루고 있는 문제였다.

바울의 예증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하였다. 사는 동안 여인은 남편에게 법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남편이 살아있는 한 그녀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편이 죽는다면 남편에게 매였던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다(롬 7:3).

 

2. 바울은 혼인법에 관한 예증을 유대교 체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롬 7:4~5)

[롬7:4,5]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답: 남편이 죽은 것에 비유하고 있다. 율법은 우리를 사망으로 정죄하였다고 한다. 이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율법의 정죄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죽음을 이기신 예수께로 가서 생명을 얻도록 했다.

 

남편의 죽음으로 여자가 법적인 구속에서 자유롭게 된 것처럼, 육체에 거하는 옛 사람의 죽음으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올 때까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재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아의 초대를 받았으며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예증은 고대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도록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바울이 의도했던 장치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십계명에 순종하라는 바울과 성경의 모든 언급을 고려한다면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 신자들에게 십계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이 본문을 도덕법의 폐기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자들조차 사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롬 7:4~5을 해석하면서 넷째 계명의 폐지 및 일요일로의 변경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다.

 

<부가설명> 바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상에서 해방되고 자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율법이 가르치는 내용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성취하셨고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율법이 지시하는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룬 것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을 이루었다는 말은 정죄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다. 율법의 정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망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役事)로 생활하게 되기 때문에 사망이 자기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 존재가 된 것이다.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이 생활하게 되는 존재가 된 것이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신 것은 나도 하게 되고 예수님이 하지 않은 것은 나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한 일도 없고 지키지 않은 일도 없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살게 된다. 우리는 율법에 매인 사람이 아니라 예수께 매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고 붙어 있다면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나도 하고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모습이다. 

 

교훈 : 시내산에서 제정된 구약의 신앙 제도는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했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뒤로 그것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섬기게 되었다.

 

 

둘째 날(월) 11월 20일 시내산과 율법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그 동안 바울은 시내산에서 제정된 율법 전체를 다뤘다. 그런데 롬 7:7에 이르러 십계명 중 하나에 대하여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십계명의 폐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지금까지의 입장을 번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포함하여 시내산에서 제정된 율법 제도 전체이지, 십계명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신의 논점을 밝히기 위해 다른 곳에서는 유대 사회 제도로부터 예를 들었고 이번에는 십계명을 예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종결된 율법 제도에 도덕법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내산 이전에도 있었고 갈보리 이후에도 존재한다.

 

1. 롬 7:8~11을 읽어 보라. 바울은 율법과 죄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롬7:8~11]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답: 율법이 분명하지 않으면 죄를 분명히 드러낼 수가 없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도덕, 시민 생활, 제의 그리고 건강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그분은 율법을 위반할 경우의 처벌 조항도 두셨다.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죄로 정의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탐심을 죄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 수 없었으리라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죄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된 뜻을 모르면 죄에 대한 인식도 없겠지만, 계시된 뜻을 알면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며 죽음과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의 다리를 놓아 율법을 존중하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성취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는 율법은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 기능은 제한적이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 구원을 얻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을 말하면서 회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그는 정죄 받은 느낌을 갖고 있지 않았다―계명이 이르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양심을 깨우칠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그래서 그가 자기 자신을 보되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정죄를 받은 죄인으로 보게 되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죽은 것은 율법이 아니고 바울이었다”(화잇 주석, 롬 7:9).

 

<부가설명> 죄가 없는 것과 죄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죄인이 죄에 대하여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어떤 노인이 손자를 데리고 병원에 와서 손자를 진찰하기를 원했다. 보기에도 손자는 환자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노인은 아주 튼실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기는 70이 넘도록 고뿔한 번 안하고 사는데 아들, 며느리가 다 폐병으로 죽었다고 푸념을 하면서 이 어린 하나 남은 불씨마저 이렇게 앓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의사가 노인을 자세히 살피더니 어르신 이리 좀 오세요. 하고는 저고리를 벗어라고 한다. 놀란 노인이 손자 진찰하라는 것인데 왜 내게 이러느냐고 하였다. 의사가 억지로 앉히고 진찰하고는 X레이를 찍으라고 했다. 결과는 이 노인이 폐 천공이었다. 아들 내외나 손자가 이 할아버지 때문에 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폐병에 대한 자각증상이 전혀 없었다.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율법이 없을 때는 이런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죄를 인식하게 하려고 성문화된 율법을 주신 것이다. 바울이 탐내지 말라는 열 번째 계명을 특히 예로 든 것은 탐심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남을 의식해서라도 조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남이 인식하지 못한다. 남이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죄로 여겨지지 않는다. 바울이 죄와 율법 문제를 다루면서 탐심을 예로 든 것은 죄는 마음과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마음은 생각의 근원이다. 생각이 어떠하면 사람됨이 그렇게 된다. 생각은 산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작용이다. 사지가 마비되어 누워있어도 생각은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닐 수 있다. 바울은 이것을 인식하고 지적한 것이다. 율법이 없어도 이미 사람은 사망의 존재로 있는 것이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율법을 통하여 지적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사유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돌아오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그 생명은 사람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훈 : 구약의 신앙 제도는 메시아가 오심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지만 죄를 정의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하는 도덕적인 율법은 폐지되지 않았다.

 

 

셋째 날(화) 11월 21일 율법은 거룩하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 7:12, 14).

 

1. 롬 7:12을 읽어 보라. 지금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답: 율법 내용 자체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을 정죄하고 경고하는 것이다. 결과로 구주께로 가도록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에 바울은 가능한 한 율법의 가치를 높이려고 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지만, 그 존재 목적 이상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즉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다. 구약의 율법은 그것이 제도이든 도덕법이든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과 믿음으로 얻는 그분의 의로 말미암는 것이다.

 

2.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바울은 무엇을 탓하고 있는가? 반면 무엇 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가? 이런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롬 7:13)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여 자기를 죽게 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율법을 탓하지 않았다.

 

이 성경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되도록 가치 있게 제시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상황, 즉 “온갖 탐심”을 이루게 된 것에 대하여 율법이 아닌 죄를 탓하였다(8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동의 표준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지만, 바울은 그 앞에서 죄인으로 정죄 받을 수밖에 없다.

 

2. 바울을 끔찍한 죄인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죄가 강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롬 7:14~15)

[롬7:14,15]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답: 신령한 율법에 자신이 노출 되었기 때문이다. 

 

‘육신에 속한’이라는 말은 ‘육체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정죄를 제거하실 수 있었다(롬 8:1).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를 죄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실 수 있었다.

바울은 자신이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한다. 그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에게는 자유가 없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율법이 말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죄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를 막는다.

이런 예증을 통하여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메시아가 필요함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은혜 아래 있을 때만 승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다(롬 6:14). 같은 주제가 로마서 7장에서 재차 강조되고 있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죄라는 무자비한 주인의 종이 됨을 의미한다.

 

<부가설명> 죄는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사망은 죄로 인하여 왕 노릇한다. 형벌이라는 것이 없다면 죄가 죄라고 할 수 없다. 죄라고 하는 사상에 기본적으로 형벌이 바탕에 있다. 그 형벌의 가장 무서운 선고가 사형선고이다. 성경이 계시한 죄의 결과가 바로 사망이다. 죄가 이 사망으로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지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것이다.(히2:15) 사망에 처하여 있는 한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도덕적으로 탁월한 성품을 이루어도 여전히 죄인이다. 죄 아래 팔렸다는 말은 바울 자신만 아니라 인간의 상태를 탄식하는 것이다. 율법이 말하는 선을 행하기 원하여 그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 행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않는한 그것이 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간과해서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의를 인간이 율법을 범하는 것과 율법을 다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은 율법을 주어서 정직하게 그것을 살펴보아서 자신은 스스로 도적히 율법이 지켜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죽은 자가 어떻게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있겠는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육신에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육신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고 그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낸 것을 믿어야 하고 믿을 때 생명을 얻는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의이다. 스스로 속지 말자.

 

교훈 : 율법은 매우 선한 것이지만, 메시아가 없는 율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드러낼 뿐이다. 구원을 바라는 자는 율법 아래가 아닌 은혜 아래 있어야 승리할 수 있다.

 

 

넷째 날(수) 11월 22일 로마서 7장의 사람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6~17).

 

1. 여기서 제기하는 갈등은 무엇인가?

 

답: 율법이 제시한 선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달을 때 율법이 선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것을 행할 수 없는 자신은 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율법을 거울처럼 사용할 때, 성령은 그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편 죄인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함으로 그가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에 동의함을 나타낸다.

 

2. 바울은 앞서 제시했던 요점을 어떻게 다시 강조했는가?(롬 7:18~20)

[롬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답: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고 고백함으로 강조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필요를 절실히 느끼도록 성령은 가끔 사람들을 ‘옛 언약’과 같은 경험으로 이끈다. 엘렌 G. 화잇은 이스라엘의 경험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성들은 그들의 마음의 죄악과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선뜻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자신들의 의를 세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라고 선언하였다.… 그러고도 불과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리고 새긴 우상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깬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을 바랄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과 용서의 필요를 깨달았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나타나 있고 희생 제물로 예표된 구주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1~372).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날마다 주님께 드리는 일에 실패함으로 죄를 섬기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갈 길이 멀 뿐이지 자신은 성화의 정상적인 과정을 밟고 있다는 식으로 상황을 합리화시킨다. 그리스도께 죄를 가져가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하는 대신,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로마서 7장의 주장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러나 실상 로마서 7장의 주장은 죄의 종이 의를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가설명>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18~20)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써 보면 뜻이 분명해질 것이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영생의 생명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생명이 활동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이 생명의 활동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사망이 활동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사망이)니라.” ()안에 쓴 말을 읽으면 이 문장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선(善)은 영생의 생명의 작용이고 죄와 악(惡)은 사망의 작용이다. 사람이 영생의 생명을 받았을지라도 아직도 아담 안에서 받은 사망의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투쟁을 한다. 성령으로 육의 생각을 죽여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생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교훈 : 우리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핑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지만, 예수님께 승리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섯째 날(목) 11월 23일 사망에서 건져 냄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1. 롬 7:21~23을 읽어 보라. 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롬7:21~2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답: 아마도 모든 그리스도인이 겪는 갈등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육체의 법과 죄의 법을 동일시하고 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한다(롬 7:25). 죄를 섬기고 그 법에 순종한다는 것은 사망을 의미한다(10~11, 13절). 따라서 죄에게 순종하고 있는 그의 몸을 “이 사망의 몸”이라고 묘사해도 무방한 것이다.

마음의 법이란 하나님의 뜻에 관한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이다. 성령의 확신 아래 바울은 이 법에 동의한다. 그의 마음은 이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가 죄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대의 마음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그대의 육체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우리가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롬 7:24~25)

[롬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답: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말한 후에 왜 이미 벗어난 문제에 대하여 다시 영혼의 갈등을 언급하는지 의아해 한다. 어떤 이는 이 감사의 표현을 삽입된 감탄구로 이해한다. 그들은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절규 뒤에 그와 같은 감탄구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찬란한 해방(롬 8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울이 앞서 말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죄와의 갈등을 다시 한번 고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내 자신”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롬 7:24~25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리스도 없이 남겨진 자아는 죄에 대하여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들은 비록 자아가 끊임없이 살아난다 할지라도 승리의 약속을 구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아무도 그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굴복하도록 할 수 없다. 그런 결정은 오직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승리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다.

 

<부가설명> 로마서 7장의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경험을 했기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학자들 사이에는 7장의 바울이 회심 전의 사실인지 회심 후의 사실인지를 두고 논쟁을 하고 있다. 회심 전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어의 시제(時制)를 두고 말한다. 회심 후의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용의 사실을 두고 말한다. 내용의 사실을 두고 볼 때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는 것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생기는 경험이 아니다. 그래서 지체 중에 있는 죄의 법과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갈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 5:15~18의 말씀은 이 갈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이 갈등을 7장에서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7장의 사람은 거듭났지만 지체 가운데 죄의 법의 공격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승리하는 사람인 것이다. 바로 우리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경험으로 날마다 살아가자.

 

교훈 : 우리가 진정으로 사망에서 구원을 얻기 원한다면 자신이 절망 중에 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주신 약속을 선택해야 한다.

 

 

여섯째 날(금) 11월 2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계속 죄를 범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13).

 

“바울은 그의 형제들이 죄를 용서하시는 구주의 크신 영광이 유대인들의 모든 성소 제도에 깊은 뜻을 부여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랐다. 그는 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희생제물로 죽으셨을 때 표상은 그 원형을 만났다는 것을 깨닫기 바랐다.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의문의 율법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도덕률과 관계가 있었고 영화로웠다. 그 모두가 신성의 소인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움과 공의를 나타냈다. 폐지될 의문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성결하게 하는 영을 주실 때, 그 실체는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화잇 주석, 고후 3:7~1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다음의 루터의 말에 동의하는지 안교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롬 7:25에서 사도는 이렇게 썼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는 무엇보다 명백한 진술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의롭게 된 사람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라거나 ‘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라고 하지 않고 ‘내 자신이’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즉 한 사람의 전인이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섬기며 죄의 법을 섬기는 잘못에 대해 자비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아무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다. 사도도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알다시피 그것은 내가 이전에 말했던 것이다. 성도들은 의로운 동시에 죄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 그분의 의가 그들을 덮고 그들에게 전가된다. 반면 그들이 율법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악한 욕망을 품고 있음을 고려하면 그들은 죄인이다. 그들은 치료 중인 환자와 같다. 그들은 병들었으나 희망이 있으며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대는 건강을 되찾고 있다. 교만하게 자신은 다 나았다고 주장하는 그러한 환자들은 최악의 고통을 겪을 것인데 왜냐하면 더 심한 병이 재발할 것이기 때문이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p. 114, 115.

※ 바르게 표현 내용이다. 우리가 다 이런 경험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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