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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그분의 실제적인 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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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등불과기름 작성일08-04-12 00:28 조회5,6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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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4월19일(안)오후7시11분

제3과 그분의 實際的인 人性
<擴大鏡>
◎ 아무리 좋은 것이고 값진 것이라도 그 가치를 모를 때에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인 것과 같이 예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이신 분이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으로 이 땅에 오심과 또한 우리와 늘 함께하심을 모를 때에는 평안(平安)과 행복(幸福)은 그림의 떡일 것이다.

日 4월13일
<“크도다. 敬虔의 秘密이여:(딤전 3:16)>
◎ 비밀(秘密)이라는 말은
= 사전적인 의미로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을 비밀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筆者)는 비밀에 있어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싶다.
1. 첫째는 = 비밀(秘密)이 알려지게 되면 자신에게 불이익을 받는 것으로 사단의 비밀이 있고,
2. 둘째는 = 비밀이 알려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유익(有益)한 것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신분의 하나님의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예배(禮拜)와 경배(敬拜)와 행복(幸福)과 건강(健康)등에 가짜를 전파하기에 그의 사력(死力)을 다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분리(分離)시키는 일에 대한 비밀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나의 경쟁자이고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진리(眞理)의 삶을 통하여 서로가 더불어 살고 도와주는 이웃으로 살면서 약자(弱者)와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유(自由)와 평강을 위하여 경건의 비밀을 주셨는데 그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구속주(救贖主)로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하게 하신 것을 말한다.

◎ 경건(敬虔)의 비밀(秘密)이란 무엇인가?
경건(敬虔)의 비밀은
‘모든 인류의 소망의 기초(基礎)요 모든 위로의 원천이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육신(肉身)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靈)으로 의(義)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天使)에게 보이시고 만국(萬國)에서 전파(傳播)되시고 영광(榮光)가운데서 올 리 우셨음이라는 말씀이다.’

☞ 요약한다면
“인간의 육체(肉體)가운데로 그리스도께서 성육신(聖肉身)하신 신비(神秘)”를 경건의 비밀이라고 한다.

◎ 1. “온 하늘의 사령관이셨던 분이 당신의 왕복(王服)과 왕관(王冠)을 벗어 놓고, 타락한 인류의 속절없음을 깨닫고 우리를 위해 인간성(人間性)이 신성(神性)과 연합할 수 있게 해 주시고자 인성(人性)을 쓰시고 이 땅으로 오신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분은 우리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고후 4:17) 하늘의 보화를 소유할 수 있게 해 주시고자 가난하게 되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은 한 가지 굴욕(屈辱)에서 또 다른 굴욕(屈辱)으로 내려가셨고, 마침내 신인(神人) 양성의 분, 고난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당신이 하신 것보다 더 큰 겸손을 보이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그보다 더 낮게 몸을 굽힐 수는 없으셨다.
이것이 경건(敬虔)의 비밀(秘密), 곧 하늘의 대리자들을 타락한 인류에게 봉사하도록 고무시키므로 세상에서도 구원의 계획에 비상한 관심이 일어나게 하는 비밀이다.
이것은 타락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큰 계획을 실천함에 있어서 온 하늘이 인류와 연합하도록 고취시킨 비밀이다.”(7증언, 28-29)
◎ 2. “경건(敬虔)의 비밀(秘密)”
품성(稟性)을 재는 표준(標準)은 임금의 계명(誡命)이다.
계명(誡命)은 죄(罪)를 찾아낸다. 계명에 의하여 죄를 알게 된다.
그러나 죄인은 항상 십자가에서 치욕적인 죽음을 당하시고자 그분 자신을 낮추신 그분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에 의하여 예수께로 이끌린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연구 주제인가!
천사도 이 놀라운 비밀(秘密)을 들여다보기를 간절히 원하며 애쓴다. 그것은 가장 높은 인간의 지성에라도 부담을 지울 수 있고, 사단의 편을 택함으로 타락(墮落)하고 속임을 당한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할 수 있게 하는 연구이다. 사람이 그분과 같아질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타락했으나 구원함을 받은 인간을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하실 것이다.
이것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부터 바로 읽으라.”(3기별, 169)

月 4월14일
<對立되는 主張이 생겨남>
◎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로부터 많은 논쟁과 주장이 생겨났지만!
☞ "예수님"이 누구이셨는가에 대한 논쟁(論爭)은 2세기부터 6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논쟁의 내용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되어서 그분이 하나님이시냐?
그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관하여 비난(非難)하는 사람들과 정죄(定罪)하는 사람들과 선언과 반론 등등 많은 소동과 논쟁이 많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예수님의 본성과 신원에 관한 일체의 것들이 성경적이 정통으로 결론이 나며 논쟁은 끝이 난다.

◎ (에비온-파 Ebion-派 )
1.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否認)하는 유대교의 한 파(派)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사람에 지나지 않으나, 신법(神法)을 충실히 지킨 의인(義人)으로서 침례(浸禮)를 받을 때에 비로소 메시아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이단(異端)이다.

2. 에비온파는 초대교회 시대에 발생했던 이단중의 하나로써 이들의 주장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합한 혼합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중요시 하여 토라를 경전(經典)으로 받아들이고 바울의 서신들은 무시했으며 마태복음만을 복음서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동정녀(童貞女)로 의한 탄생과 신성(神性)을 부인(否認)하고 예수는 단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써 신성(神性)을여받은 예언자(預言者)로 간주하였다. 에비온파의 견해는 1세기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유대인-기독교인(jewish christians)에게서 호응을 받고 퍼져나갔다. 그렇지만
에비온파(Ebionites) 들은 연이어 발생한 영지주의(Gnosicism)에 대부분 흡수되었고 그들의 주장중 일부는 이슬람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 15:5절의 “바리새파”와 갈라디아서 2:4절의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은 이들 “에비온파”를 가리킨 말이다.

◎ 아리우스파 (Arianism)
1. 4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아리우스의 주장을 교의로 삼는 일파이다.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사제(司祭) 아리우스는,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대등하며, 오직 성부만이 영원하다. 성자는 모든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을 뿐, 신이되 피조물과 신의 중개역할을 하고, 신이 그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선택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은총을 입어 하나님의 양자로 선택받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성자를 반신(半神)으로 전락시켰으며, 성자만이 인간과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구속 개념을 훼손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니케아 공의회(325)에서는 이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배척하였으나, 그 뒤 아리우스와 그 일파는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여 콘스탄티우스 2세 아래서는 전 로마제국을 지배할 만큼 세력을 떨쳤다. 콘스탄티우스 2세 때 아리우스파는 ‘성자는 성부와 같지 않다’라고 과격한 입장을 선언하여 온건파를 자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엄격(嚴格) 아리우스파와 반(半)아리우스파의 분열이 일어난 데다 황제의 죽음(361)까지 겹치자 급속도로 몰락하였다.

380년 2월에 황제 데오도시우스와 그라티안은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감독들이 자기의 정통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는 유명한 칙령을 반포하였다.(Cod. Theod. XVI, I, 2; Sozomen, VII, 4)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오자마자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추방했다. 아리우스파 감독 데모필루스(Demophilus)를 추방하고 나지안즈의 그레고리(St. Gregory of Nazianzus)를 이 교구의 감독으로 임명했다.

381년 1월에는 도시에 있는 모든 아리우스파 교회들을 폐쇄했고 추종자들을 추방했다. 데오도시우스의 통치령 안에서 아리우스파를 축출하기 위함은 물론 마니교의 무리들과 기타 이단들을 몰아내기 위한 정밀한 조사가 명령되었다. 데오도시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된 아리우스파의 확산을 막고 정통 신앙을 지켜낸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381년에 초대 공의회 중 두 번째 공의회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하여 일차 공의회인 니케아 회의가 채택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 했다.즉,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는 니케아 신경(信經)을 재확인하고 아리우스파 문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뒤로도 아리우스파는 제국의 북쪽 게르만인(人)들 사이에 널리 퍼져 게르만인의 민족적 종교라고도 할 만한 위치를 얻었다. 즉, 이탈리아에 있었던 오도아케르의 헤둘루왕국이나 동고트족, 반달왕국 등이 대표적이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그노시스파[(그리스어)gnosis派]

1. 1세기 말에서 2세기의 기독교 초창기에 영적인 지식을 신앙의 중심으로 한 그노시스주의를 신봉하던 일파.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져 추방되었다.

가).기독가현설[基督假現說]
오직 외관상 육체의 형태를 취하였을 뿐이라는 주장. 그노시스파와 카타리파가 대표적으로 주장하였다.
나). 유출설[流出說]
현실의 세계가 완성된다는 형이상학적 학설. 신플라톤학파나 그노시스파 따위가 제창한 우주론이다.

◎ 각 시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否認)하는 자들과 인성(人性)을 부인(否認)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나 결국에는 성경적으로 정통함이 결론이었다.

火 4월15일
<우리의 人性을 取하심> (갈 4:4)
◎ 인간(人間)이란 ?
1. 사람은 큰 체구를 가진 고등 동물(高等動物)이지만,
강한 뿔이나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같은 무기(武器)가 없고, 추위를 막는 털이나 질긴 가죽도 없으며, 레이더와 같은 감각기(感覺器)도 없고, 비둘기처럼 밝은 눈이나 개처럼 예민한 코도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동물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처럼 동물로서의 불리한 조건을 극복(克服)하고 고등 동물이 된 것은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2. 인간(人間)이란 그 어느 동물에도 없는 세 가지의 지정의(知情意)라는 특성이 있다.
가). 지정의(知情意) = 인간의 세 가지 심적(心的)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3.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지정의(知情意)를 가지신 분이시다.
가). 예수께서는 피곤하여 주무셨고 (마 8:24)
나). 그분께서는 이른 아침에 성(城)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배고픔을 느끼셨으며)
( 마 21:18)
다). 행로에 피곤함을 느끼셨고 (요 4:5-6)
라). 목마름을 아셨다. (요 4:7, 19:28)
마). 나사로의 죽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요 11:33-35 )

◎ 인성(人性)을 취(取)하신 예수님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셨다. 이것은 그분의 사명의 일부였다.
그분이 인간적 본성의 특성을 필히 소유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혈육’(히 2:14)이셨다.
‘범사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동료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걱정 등(마 4:2, 요 19:28, 4:6, 마 26:21, 8:24 참조) 다른 인간들과 같은 심리적, 육체적 감수성을 갖고 계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실 때 동정, 의로운 분노, 슬픔을 나타내셨다(마 9:36, 막 3:5). 때때로 그분은 걱정과 슬픔을 느끼셨으며 울기까지 하셨다(마 26:38, 요 12:27, 11:33, 35, 눅 19:41). 그분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으며 한 번은 피땀이 나도록 기도하셨다(히 5:7, 눅 22:44). 그분의 기도의 생애는 그분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음을 나타낸다(마 26:39-44, 막 1:35, 6:46, 눅 5:16, 6:12).(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007년, 67-68).

◎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1. 주 예수그리스도는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었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고후 5:21; 참조 마 1:23; 요 1:14; 빌 2:68주석; 눅 24:39; 롬 1:3-4; 5:15; 갈 4:4; 빌 2:7; 딤전 2:5; 히 2:14, 17; 요일 1:1; 4:2; 요이 1:7)

2. ‘그리스도는 실재하는 인간이셨고’ (YI 1898. 10. 13).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 (ST 1897. 6. 17)
‘우리의 본성을 함께 나눈 자.’ ( RH 1890. 2. 18)였다.
‘그분은 우리가 지닌 인성을 가진 무력한 아기로서 오셨고’ (MS 21, 1895)
‘인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은 죽을 존재였다. (RH 1900. 9. 4)
‘그분은 자기 제자들과 자신을 위하여 기도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과 결점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교회증언 Ⅱ권508; 참조 치료봉사 422)
참조 요 1:1-3, 14; 골 1:26-27; 히 2:14-18 주석 참조)

3.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
성육신은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안에서 신성(神性) 인성(人性)이 참으로 온전하게 불가분(不可分)으로 연합한 것이지만 각 본성은 손상되지 않고 상호 구별될 수 있도록 보존 되었다.
(참조 : 마 1:18; 요 1:14; 16:28; 빌 2:6-8 주석; 마 1:20; 눅 1:35; 요 1:14; 빌 2:5-8; 딤전 3:16;; 요일 4:2-3)

그리스도는 실재(實在)하는 인간(人間)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육신(肉身)을 입은 하나님이었다.
그 분의 신성은 인성으로 가려졌으며 볼수 없는 영광은 보이는 인간의 형체(形體)속에 가려졌다. (소망 23)
그 분의 이중 본성 곧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니셨다.
그분은 하나님인 동시(同時)에 사람이다. (MS 76. 1903)
마리아의 아들의 인간적인 본성이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으로 바뀌었는가? 아니다.
부 본성은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안에서 신비롭게 조화되었다. (서신 280. 1904)
인성이 신성을 대신 하지도 않았고 신성이 인성을 대신 하지도 않았다. (ST1899. 5.10)
신성이 인성으로 강등(降等)되지도 않고, 신성은 제 위치를 유지했다. (RH1890. 2. 18)
그분은 신성과 연합된 완전한 인성을 드러냈으나 각각의 본성은 별개로 보존 되었다.
(GCB 1899. 4기 102)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분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다. (MS106. 1897)
< 성경주석10권 510-511>

◎ 교훈: 신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는 지상(地上)에 계신 동안 참으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결코 신성(神性)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水 4월16일
<우리 軟弱함을 體恤하심> (히 4:15-16)
◎ 특히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 무엇인가 달라져서 제대(除隊)를 한다.
근간에는 매스컴을 통해서 들은바 군대도 참으로 좋아 졌다는 생각이 들지만?
(구타(毆打)나 기합이나 욕설까지도 금(禁)한다고 하니 말이다)
60-70년대의 사병들의 군대의 병영생활은 참으로 고달픈 병영생활(兵營生活)이였다.
그 이유는 언어(言語)에서부터 모든 생활이 고참들에게 이유 없이 복종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병생활을 벗고 고참이 되면 졸병 때의 모든 행위가 고참이 되고서야 이해가 간다.
즉 모든 일에 졸병 때부터 직접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구타(毆打)나 기합이나 욕설에 대해서 어떤 것인가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이나 직장생활역시 직접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 그 다음에 오는 후배들에게 잘 인도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똑같이 체험하신 분이시다.
이러한 분이 우리의 구주(救主)가 되심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어렵고 힘들고 슬픔을 체훌 하신 주님을 인하여 감사하자.

◎ (히 2:9)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
(히 2:14-15) 인간의 혈육에 속하시어 마귀의 종 된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
(히 2:16-17)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시고 대제사장으로서 죄인을 구속하심
(히 2:18)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심
(히 4:14-16)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시험 받으심
(히 5:8-9) 하나님의 아들께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시고 온전하게 되심

◎ 교훈: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자(히 4:16).

木 4월17일
<永遠한 結束> (딤전 2:5)
◎ 세상의 종교는 한번태어 났다. 죽으면 끝장이고, 잘해봐야 윤회사상(輪廻思想)으로 다음에는 다른 짐승으로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짐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사상(思想)이 우리 삶에 깊이 뿌리를 내려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으레 내가 전생(轉生)에 무슨 죄를 많이 져서 이렇게 어려운가라고 신세타령을 하곤 한다. 참으로 불쌍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영생(永生)하며 이 땅에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再臨)하실 때의 천국(天國)을 생각하기만 해도 참으로 행복하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늘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더더욱 행복하고 감사하다.

◎ 시멘트 골조가 단단한 이유는 시멘트, 자갈, 철근, 등등이 따로 있을 때에는 모두가 별거 아니지만 이 재료들을 적당한 물로 배합을 해서 굳어지면 (결속하면) 단단한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이 된다. 영원한 우리의 결속자로 계시는 주님을 인하여 감사합시다. 느낍시다. 아멘

◎ 교훈: 예수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사실만으로도 감사한데, 그분께서 영원토록 인성을 지니신 채 우리와의 결속을 유지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焦點>
1. 예수님은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으신 분이다.
2.예수님은 인간으로 이 땅에서 죄 없이 사셨고 완전한 모본으로 구속주(救贖主)로 영원히 우리와 결속(結束)되신 분임을 인하여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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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부록(末尾附錄)> 1
◎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1. 주 예수그리스도는 참으로 온전한 인간이었으며 ‘죄를 알지도 못하신’ 것 외에는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았다.
(고후 5:21; 참조 마 1:23; 요 1:14; 빌 2:68주석; 눅 24:39; 롬 1:3-4; 5:15; 갈 4:4; 빌 2:7; 딤전 2:5; 히 2:14, 17; 요일 1:1; 4:2; 요이 1:7)

2. ‘그리스도는 실재하는 인간이셨고’ (YI 1898. 10. 13).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분‘ (ST 1897. 6. 17)
‘우리의 본성을 함께 나눈 자.’ ( RH 1890. 2. 18)였다.
‘그분은 우리가 지닌 인성을 가진 무력한 아기로서 오셨고’ (MS 21, 1895)
‘인간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은 죽을 존재였다. (RH 1900. 9. 4)
‘그분은 자기 제자들과 자신을 위하여 기도 하셨고, 그리하여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과 결점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 (교회증언 Ⅱ권508; 참조 치료봉사 422)
참조 요 1:1-3, 14; 골 1:26-27; 히 2:14-18 주석 참조)

3. 그리스도의 성육신(聖肉身)
성육신은 예수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안에서 신성(神性) 인성(人性)이 참으로 온전하게 불가분(不可分)으로 연합한 것이지만 각 본성은 손상되지 않고 상호 구별될 수 있도록 보존 되었다.
(참조 : 마 1:18; 요 1:14; 16:28; 빌 2:6-8 주석; 마 1:20; 눅 1:35; 요 1:14; 빌 2:5-8; 딤전 3:16;; 요일 4:2-3)

그리스도는 실재(實在)하는 인간(人間)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육신(肉身)을 입은 하나님이었다.
그 분의 신성은 인성으로 가려졌으며 볼수 없는 영광은 보이는 인간의 형체(形體)속에 가려졌다. (소망 23)
그 분의 이중 본성 곧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지니셨다.
그분은 하나님인 동시(同時)에 사람이다. (MS 76. 1903)
마리아의 아들의 인간적인 본성이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으로 바뀌었는가? 아니다.
부 본성은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안에서 신비롭게 조화되었다. (서신 280. 1904)
인성이 신성을 대신 하지도 않았고 신성이 인성을 대신 하지도 않았다. (ST1899. 5.10)
신성이 인성으로 강등(降等)되지도 않고, 신성은 제 위치를 유지했다. (RH1890. 2. 18)
그분은 신성과 연합된 완전한 인성을 드러냈으나 각각의 본성은 별개로 보존 되었다. (GCB 1899. 4기 102)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분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었다. (MS106. 1897)
< 성경주석10권 510-511>

<부록 2>
말씀 앞에 정관사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닌가?

(요 1:1)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문제(問題)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에서 하나님 앞에 헬라어 정관사 호(ho)가 없으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으며,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신(神)(a god)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신세게 번역’에서 “이 말씀은 하나의 신이니라”로 번역하고 이 구절을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고 단지 첫 번째 피조물(被造物)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다. 말씀 앞에 정관사가 없으면 과연 하나님과 동등(同等)하다고 볼 수 없는가?

◉ 해석(解釋)
A. 아리우스는(Arius)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열등하며 단지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하여 니케아 종교회의(AD 325)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단(異端)이 역사상 되풀이 되는 것이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요한복음 1:1을 그리스도가 열등하다는 근거(根據)로 삼고 있다.
과연 그런가?
요한복음 ·1:1은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천명하는 많은 구절이 나온다.
(요 1:18; 10:30; 14:9; 20:28; 요일 5:20; 롬 9:5; 딛 2:13)
의심(疑心) 많은 도마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요 20:28).
특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고 증거(證據)한 대부분의 성경절(聖經節)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것을 주목(注目)하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단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그 시대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임을 밝히 드러내려 했던 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쓰여 진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을 가진 요한복음의 첫 머리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theos)앞에 정관사가 없어도 창조주 하나님으로 쓰이는 용법이 신약에 나오는가?
다음의 성경 절들은 정관사 없는 쎄오스(theos)를 하나님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고 있다.
(막 12:32; 눅 20:38; 요 1:1; 8:54; 롬 8:33)

B. 요한복음은 좋은 헬라어로 쓰여 졌기 때문에 헬라어 교과서로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실수로 헤라어가 잘못 쓰여 질 리가 없으며 요한은 여기서 일부러 정관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헬라어에서는 동사 양편의 명사에 다 정관사가 있을 경우 그 두 명사는 완전히 똑같은 인물이다.
즉 말씀이 아버지 하나님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사상이 무너진다.
유일신(唯一神) 한분만 존재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런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술어로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앞에 고의적으로 정관사를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는 관사가 있고 다른 하나에 관사가 없을 경우 그 두 명사는 개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본질과 목적과 성품이 같은 것을 의미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과 말씀은 개체가 같은 것이 아니라 본질과 목적이 같은 하나님이 되어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요약>
요한이 하나님(theos)앞에 정관사를 쓰지 않는 것은 실수이거나 혹은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보다 열등하게 표현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다.
헬라 문법상 두 단어에 다 정관사사 있으면 아버지하나님과 말씀이 동일개체가 되어 삼위일체(三位一體) 혼란을 가져오기 때문에 요한이 고의적으로 정관사를 쓰지 않은 것이다.
정관사가 없어야 개체는 다르지만 본질과 목적이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임을 천명하는 것이 기록의 목적이었던 요한복음의 첫 머리에 예수를 비하시키는 정반대의 표현이 나올 리 없다는 것을 여호와의 증인은 알아야한다.
그리고 신약에는 하나님(theos)앞에 정관사가 없어도 하나님으로 쓰이는 용법이 여러 번 나오고 있다. (막 12:32; 눅 20:38; 요 1:1; 8:54; 롬 8:33) <성경주석 부록-2 176-177>

(부록-2)
救主 예수 그리스도의 存在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人子’ ‘하나님의 아들’ ‘主’ 등이 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이름들입니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칭호가 ‘예수’(Ίησούς)인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라는 이름이 헬라어 형태로 音譯된 것입니다.(수1:1, 슥3:1 참조) 이 이름은 ‘救援者’(savior)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固有名詞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本名입니다.

의미 자체만으로 본다면 다른 이름이 필요치 않을 만큼 좋은 이름으로서 ‘그리스도의 입장’을 잘 나타내주지만, 한편 이 이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普遍的으로 널리 사용되는 하나의 고유명사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이름이 많이 쓰이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救援을 위한 待望思想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호칭할 때 이왕이면 ‘예수’와 ‘그리스도’를 竝行시켜 사용하는 것이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나타내주는 방법입니다.

예수란 이름만 사용한다 해서 부족할 것은 없지만, 더욱 정확하고 강력한 의미부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약성서 히브리어의 ‘메시야’를 헬라어 의미로 바꾼 표현입니다.
히브리어의 ‘마솨’라는 단어는 헬라어의 χρίω라는 단어와 뜻을 같이하는데, 그것들은 각각 물 같은 것을 ‘붓는다. 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χρίω의 명사형으로서 Χριστός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구주 예수의 ‘地位’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아 역할을 맡는 직위는 ‘祭司長’과 ‘先知者’ 그리고 ‘王’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 는 것은 ‘성령의 認證’과 ‘臨在’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세움을 입는다. 는 상징적 표현이 기름부음의 예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으로서의 직무를 受任한 존재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고, 公生涯의 시작에 앞서 요한을 통해 침례를 받으실 때 그의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함으로 ‘그리스도의 입장’이 확인되었습니다.

‘人子’(Son of man)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예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실 때 종종 이 ‘人子’라는 용어를 친히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로 표현된 내용은 구원약속의 성취자인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지닌 임무’와 그리스도는 ‘인간의 경험을 겪은 분’으로서 ‘모든 사람의 고통에 대한 體驗’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누누이 ‘사람의 아들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해왔습니다. 인자는 아담의 자손으로서 ‘인간과 동등’하게 되사 肉을 입고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로서 하늘로부터 ‘세상에’ 오셨으며 또한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의 神人적인 肉化의 본성은 그의 ‘事役活動의 目的과 性格’을 반영합니다. 즉 그는 인간을 ‘하나님과 和解’케 하는 분이며 세상의 ‘인간과 더불어’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 구원의 십자가는 요한복음 1:14의 肉化의 의미를 분명히 해줍니다.

(요1:14) “말씀이 肉身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獨生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과 결코 비교할 수가 없이 ‘비천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을 생각하시고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구체적 표현’이 그리스도의 肉化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人子가 되셨으므로’ ‘구원의 다리’를 놓으신 것입니다. 이 다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한 구원의 나라에 이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결코 발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限定된 ‘罪의 眼目’을 가지고 ‘무한한 하나님의 모습’을 측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人子이신 그리스도는 곧 ‘구원의 本體’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지닌 ‘사랑의 목적’이며 役事하시는 ‘活動內譯’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인자가 되셨으므로 人子는 ‘사람의 구원을 성취’하십니다.

또한 인자는 ‘그리스도의 人性’을 표시하므로, ‘인간의 苦難과 슬픔을 擔當’하신 분의 칭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人子로 말미암은 위로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體驗’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居處가 있으되 오직 人子 그리스도는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는 장미로 장식된 아름다운 길을 지나 아늑한 별장에 들어가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항상 피곤하게 ‘여행하면서/떠돌면서’ 복음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겪으신 고난은 ‘義를 위한 목적’에서 實行된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肉的인 것 대신에 ‘靈的인’ 것을 선택하며, 세속적인 보물 대신 ‘하늘나라의 보물’을 목표로 한 교훈의 견지에서 ‘甘受된 고난’임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르려면 그가 겪으신 고난에 ‘同參하는 믿음’의 위로가 결부되어야하며, 그로써 완전한 구원을 ‘맛보듯’ 해야 만합니다.

결국 ‘고난의 참된 은혜’는 무엇입니까? ‘人子를 알게’ 하며 그의 ‘구원을 소유케’ 하는 하나의 道具입니다. ‘인자이신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극복하고 삶의 승리를 체험케 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친히 하나님이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이고 탄생 자체가 ‘超自然的인’ 성령의 役事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눅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대부분의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主’라는 이름도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계셨던 당시에 ‘일반적인 존칭’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만 그리스도에게 ‘특별한 의미로 적용’된 것은 ‘그리스도의 復活事件 以後’에 이루어진 ‘교회의 構成’으로부터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 된 교회’의 ‘主’가 되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主’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平康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인사했습니다.(롬1:7) 에베소 교인들에게도 “우리 ‘主’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말했습니다.(엡1:17)

神論講義에서 이미 言及되었듯이, ‘主’는 하나님에게 붙여진 이름이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이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보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위치에 계신 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그리스도의 性質 (The nature of Christ)
그리스도는 ‘신비스런’ 분입니다. 그는 神性과 人性의 ‘兩面을 소지’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神性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고, 人性은 그가 ‘인간과 동일한 육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앞서 ‘人子’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서 드러나듯이, 그가 인간의 몸을 취하셨으므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들’입니다. 인성의 면에서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과 모두 同一합니다. 인간의 육체를 통해서 경험될 수 있는 내용이 그리스도에게서 모두 나타날 수 있습니다. ‘喜怒哀樂의 情緖’나 ‘육체의 피로와 고통’ 등 모든 것이 인성의 소유자인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罪性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人性과 無關’합니다. 그리스도는 인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인 출생’을 한 신비스런 분으로 아담의 후예로 존재한 ‘자연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신을 가리켜 ‘사람’이라 표현하셨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사람’이라 일컬어졌습니다. 예수는 ‘육체와 영혼’을 가지고 계셨으므로 분명히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肉體로’ 태어나셨고, 어린이의 ‘成長過程’을 보내셨으며, ‘슬픔을 경험’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둔 상황에서 고난을 예상하여 ‘가능하다면 십자가를 피하고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표시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이면서도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가 인성의 소유자가 되어야했던 것은 오직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성부와의 ‘구속계약을 성취하기 위한 필수과정’이었습니다. 그 길만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원한 의를 이루는 ‘완전한 방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人性을 소유하였다고 해서 그가 인간과 ‘동일한 인격의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죄와 무관’한 하나님의 인격성에 ‘인성이 곁들여진’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특별히 ‘신비스런 존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사람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므로 ‘神이 肉體 가운데 거하는 二重構造’의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成肉身’(Incarnation)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두 인격이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한 존재에 두 인격이 내재하면 혼란작용을 가져오게 합니다. 정신의학에서 한 사람 안에 두 인격이 존재하여 서로 다른 인격의 양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경우는 한 존재 안에 ‘한 인격’이 내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한 인격은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필요상’ 육체를 가지셨으므로, ‘肉體의 목숨(生命)에 따라오는’ 인성을 보이고 경험하는 존재이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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