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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제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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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5-29 07:07 조회4,07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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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제자도
6월 6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1분)

도입)
Christian Triumph라는 잡지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 어느 시골 역에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기차가 천천히 정차하는 동안 한 급한 승객이 훌쩍 뛰어내렸다. 그런데 기차 앞에서 광주리에 과일을 팔고 있는 절름발이 소년을 보지 못하여 그만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절름발이 아이는 땅바닥에 넘어지고 과일이 사방에 흩어졌다. 그런데 그와 부딪친 사람은 무슨 일로 바빴는지 “미안해!”라고만 말하고는 급하게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기차가 안전하게 정차하자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어떤 신사가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는 자기 가방을 내려놓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과일을 줍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은전 한 개를 꺼내어 과일 광주리 위에 얹어 주었다. 눈물이 글썽한 아이는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혹시 아저씨가 예수님이세요?” ”아니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야! 예수님이 여기 계셨으면 나처럼 이렇게 하셨을 거다.“ 그리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제자도란, 마음속으로 믿는 것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 유진 피터슨

기억절: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연구범위: 출 18:13-27, 마 4:19, 9:9, 막 3:13-19, 8:31-38, 롬 8:18.

중심 사상: 제자는 일생 동안 배우는 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리고 어떤 고난이 있든지 우리는 따라야 한다. 제자가 되는 데에는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고난도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제자로서 받는 보상이 미미하게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생명의 참된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을 겪든지 그것은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안식일 오후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지력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비록 교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선행 조건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배운 바를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일생 동안 스승으로부터 배우며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란 무엇인가? 재림교회 성경사전은 이렇게 정의한다. "특히 소문난 교사 등을 따르는 생도 또는 신봉자를 가리키는데, 신약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헬라어 마쎄테스(mathetes)를 번역한 것으로서, '배우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제자란 '배우는 자,' '생도' 또는 '신봉자'를 의미한다."(재림교 성경사전, 288)
이제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일요일(5월 31일)
지도자들과 따르는 자들(출 18:13-27)

도입)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다. 눈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행동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땅에 살면서 지도자들을 존경하여야 한다. 직장에서도 상사를 귀하게 여기고 비록 그들이 실수를 하더라도 존경하는 태도를 잃어서는 안된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영적인 지도자들을 알아주고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하였다. 교회에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을 존경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가 없다. 그 영혼은 어느 곳에서도 위로를 받을 대상이 없는 것이다. 목사님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을 하면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같다. 비록 허물이 많았던 엘리 제사장을 통해 한나가 은혜를 입었던 것을 기억하자. 지도자를 흔들지 말자. 그러면 결국 그 자신의 영혼이 유리방황하게 될 것이다.

1. 출애굽기 18:13-27에서 우리는 지도력의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구절들에서 지도자들과 추종자들에 관한 어떤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물론 하나님이 보실 때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지만,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지도력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만약 지도자들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은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심지어 하늘에도 뚜렷한 역할 구분이 있는데 이를테면, 천사들이 있고 천사장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에도 지도자들을 택하셨다. 그분께서는 성소 봉사를 조직하실 때에도 적절한 지도력이 있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사사들과 선지자들과 왕들을 통해 일하셨다.
그러나 그 지도력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이들이 없다면 지도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지도자는 특별히 자신의 목표를 인식하고 아주 가까이서 일하면서 기꺼이 배우고 도울 그룹을 필요로 한다.

2.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기사를 마가복음 3:13-19에서 읽으십시오.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두었던 또 다른 교사의 예가 있습니까?(참조 막 2:18)
답:
예수께서 제자들을 두신 것은 전혀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교사가 그를 따르는 '견습생들'을 두는 일은 당시의 관례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었는지는 주목할 만하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인식할 수 없었던 잠재력을 그들에게서 보셨던 것이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이 나사렛 목수를 따르기 위해 즉각적으로 자기들의 생업을 버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가까운 가족들도 발견하지 못한 어떤 비범함을 그들은 분명히 그분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열두 제자들이 특별한 무리이긴 하지만 복음서에는 '제자들'로 언급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교훈: 제자란 지도자를 전적으로 따르며 돕는 자를 가리키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족과 생업을 뒤로 하고 즉시 그분을 따랐다.

부가적용)
제자도는 예수님에 의한 그리고 예수님에게로의 부름이다. 이 예수님의 부르심은 전혀 인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따라야 했고 함께 있어야 했으며 전심으로 그에게 헌신해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불러 그의 제자가 되라고 하셨을 때에는 그들과 함께 자신을 나누셨다. 그리고 자신을 주셨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증인으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바로 그 자신에 대한 증인이 되게끔 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란 그를 아는 것이며,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를 믿는 것이며,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제자도는 모든 삶을 무조건적으로 자기에게 바칠 것을 요구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있어서는 절반이라는 개념이 없다. 전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명확하게 순종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순종의 삶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일상적인 차원을 초월해서 놀라운 차원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 어느 것도 주님과제자의 관계를 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월요일(6월 1일)
제자도의 증표: 순종과 충성(마 4:19)

도입)
제자도의 가장 중요한 증표는 순종과 충성이다. 주님을 무조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 부자청년 (막 10:21-22), 밭을 산 사람(눅 14:18-19), 결혼한 사람 (눅 14:20) 등은 주님을 무조건 따르지 못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스승이 하시는 말씀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 그렇게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당신은 지금 무조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만약 당신이 즉시 순종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를 좇았다는 것과, 또 그의 부르심에 미루는 법이 없이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단지 지식만을 나누신 것이 아니다. 그분께서 풀어주시는 성경 말씀과, 그 당시 영적 지도자들이 그분께 퍼부어대는 수많은 질문에 답하시는 것을 항상 듣는 것은 분명히 놀라운 특권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그분께서 그 당시의 학자들을 능가하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참된 삶의 문제들로부터 생명력 없는 전통을 분리해 내셨다. 제자들은 아직 더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전능하신 분께 굴복시키는 법을 배워야 했다.

1. 우리는 다음 구절들에서 제자도의 어떤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마 4:19, 9:9, 막 8:34)
답:
“나쁜 소리를 듣거나 좋은 소리를 듣거나 간에 그분을 따르라. 가장 어렵고, 친구 없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면서 그분을 따르라. 자신을 잊고, 극기와 자아 희생의 행위로 타인에게 선을 베풀며, 욕을 먹는다고 욕하지 말고, 타락한 인류에 대하여 사랑과 동정을 나타내면서 그분을 따르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버리셨다. 비천한 구유에서부터 십자가까지 그분을 따르라.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교회증언, 2권, 178)

2.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떠나갔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요 6:60-70)
답: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그분을 떠나갔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신해서 그분께 충성을 고백하였다.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그들의 충성을 끝까지 증명했으며, 비록 예수께서 죄수로 체포되어 처형될 때에 근심과 의심의 순간도 있었으나, 다 초기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준다. 우리에게도 의심의 순간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충성스런 사도들처럼 자신의 연약성을 극복해야 한다.

교훈: 주님께 충성을 바치기로 고백했던 제자들도 때로는 의심의 구름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그분께 대한 순종과 충성을 바쳤다.

부가적용)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하라고 주신 일을 순종을 통하여 이루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사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순종을 배우셨다. 순종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훈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순종을 훈련하셨다. 탁월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순종을 훈련해야 한다. 만일 순종 훈련을 하지 않으면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순종은 훈련을 통해서 세워진다. 순종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기간 인내로 만들어 진다. 또한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사람들에게 특징이 있다면 그들은 변함없이 충성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충성은 변하지 않는 마음이다. 눅 6:48절에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요동하지 않는 집이란 흔들림이 없이 견고한 집을 말한다. 반석위에 잘 지은 집이다. 충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충성하는 사람은 변함이 없고 요동치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

화요일(6월 2일)
희생(마 20:20-23)

도입)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의 소원과 기대가 모두 각각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고 마음에 드는 말씀만을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을 쫓는 사람들에게 종종 실망을 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다. 더더욱 나를 따르려면 돌아가신 부모님께 인사하고 오는 것도 그만두라,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등등 이런 말씀도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전쟁이 있기 때문에 이를 준비시키신 것이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있지만 한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적인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가정 식구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세상을 즐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들이 예수를 믿게 되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뒤 따른다. 그럼으로 예수를 믿는 것은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것과도 같은 것은 사단에게 지는 것이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주인이 바뀌는 것이며, 가치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것을 안다. 그래서 말한다. 그냥 옛날처럼 지내지 왜 바꾸려 하느냐, 왜 예수를 믿어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 그냥 전처럼 지내기를 바라는 영적인 싸움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저명인사들과 함께 했던 순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도지사나 장관이나 유명인을 만난 것을 자랑스런 이야깃거리로 여긴다. 어떤 중요한 사람을 안다는 것, 심지어 그런 사람을 아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조차도 우리는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와 같은 인간적인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1.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들의 지위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마 20:20-23, 막 10:35-41, ) 이러한 태도는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입니까?(사 14:12-14)
답: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질적 번영과 사회적 지위를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을 따르는 삶에는 희생이 수반될 것이었다.

2. 다음 구절들은 제자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임을 말해 줍니까?(막 8:31-38)
답:
1945년 나치에 의해 순교당한 독일의 젊은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그의 유명한 책,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값싸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고난이 수반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생애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분의 고난과 죽음에도 동참해야 한다. "십자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할 때 우리는 고난의 열매를 맛보게 된다. 고난은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제자도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만이 십자가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다."(디트리히 본회퍼, 제자도의 대가, 뉴욕, 맥밀란 출판사, 1965년, 98)

교훈: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려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를 때에 우리는 그분의 생애에 동참하게 된다.

부가적용)
커피 향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커피 원두는 충분히 볶지 않으면 신맛이 나고, 너무 오래 볶으면 탄 맛이 난다고 한다. 볶는 과정이 없이 커피 향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인생도 볶기 전의 원두 같은 존재이다. 볶는 과정 이른바 고난이라는 과정이 인생의 향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오히려 고난을 겪을 때가 있다. 그 때에 하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의 큰 그림 속에서 보는 믿음과 인내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따르게 되면 분명한 영적인 결단이 뒤따라야 하고 세상을 버리는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구원은 이 세상을 단순하게 그냥 사는 것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그냥 종교를 바꾸는 생활이 아니라 생명을 바꾸는 것이며 구원을 얻는 것이며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길 원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양한다. 십자가를 고르려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에가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적다. 그냥 따라 오라고만 하셨더라면, 주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러나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수요일(6월 3일)
제자도의 보상(눅 9:57-58)

도입)
초기 영국의 케스윅 교단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 교사들 중의 하나였던 웹피플이라는 성직자는 젊은이였을 때 해변에 갔다가 그가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중의 하나를 갑자기 잃었다. 장례식에서 돌아오자 이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서재에서 무릎을 꿇고 이 슬픔의 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게 해 주실 것을 간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위로가 마음에 찾아오지 않았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의 말씀조차 그에게 아무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다. 얼마가 지난 후 벽난로 위에 길게 내려진 이 말씀을 맺힌 눈물을 통해서 다시 읽었다. 처음으로 그는 대문자로 인쇄된 한 단어를 주목하게 되었다. "족하다(is sufficient)" 그는 성별 된 눈으로 읽었다. 그리고 외쳤다. "주여, 나를 용서 하소서, 나는 당신의 은혜가 내게 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나는 족한 은혜를 인하여 당신께 감사드리며 그것을 이제 제 것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적절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때를 위해 유용하다. 우리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다. 은혜는 이미 주어졌으며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 머물게 된다. 이 언급이 얼마나 웅대하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은가! 실패한 결혼,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 무정한 가정, 육체의 연약함과 고통, 선교 생활의 압박감, 압도해 오는 비애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족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을 따를 때에 희생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몸소 희생의 본을 보이셨다.

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것에 대한 단기적인 보상으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눅 9:57-58, 요 15:18-25). 베드로에게는 어떤 특별한 '예언'을 하셨습니까?(요 21:15-18).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의 대가가 무엇임을 알 수 있습니까?
답: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마침내 사도들이 되었다. 사도행전의 첫 장부터, 이들은 분명 많은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전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그들은, 이제 성령님과 함께 있었으므로 반대와 박해를 견딜 수 있었다. 비록 자세한 것까지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으나, 모든 사도들이 마침내 순교의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만한 증거들이 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잔인한 죽음의 고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그는 그곳에서 결코 화려한 휴가를 보낸 것이 아니다. 그도 또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계 1:9)

2.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겪게 되는 고난 중에 가장 극심한 것은 무엇입니까?(요 10:10, 롬 8:28-39)
답: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많은 고난을 겪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주님만을 바라본다면 어떤 일을 당해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하고 영원한 당신의 평안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요 14:27). 그 평화는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빌 4:7). 그 평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에 대한 보증이 된다. 온갖 시련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이 평안은, 그리스도 없이 살기로 한 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만족을 가져다준다.

교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여도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들이 장차 받게 될 보상에 비하면 세상에서의 고난은 작은 일에 불과하다.

부가적용)
바벨론제국시대에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고난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에 결박되어 던져졌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묶고 있던 결박의 끈만 태웠다. 그 고난이 그들을 오히려 구원 하였고, 왕이 그들을 바벨론 땅에서 더욱 높이게 되었다. 바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다가온 고난은 헛된 고난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렸다. 설상가상으로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서, 날마다 유혹하는 보디발의 부인의 유혹을 뿌리친 연고로 감옥에 무고히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꿈을 잃지 않고 살았던 요셉은 고난 중에 보상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였다. 노예로 팔려갔지만 오히려 그 집에서 은혜를 입어 가정 총무가 되었다. 고난에 보상이 있다는 것은 곧 그 고난에 유익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고난은 하나님의 큰 그림의 밑그림이다. 고난 중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자.

목요일(6월 4일)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요 20:28)

(도입)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이시다. 이 말은 헬라어의 순서대로 옮긴 것이다. 예수님은 신적 메시아이시다. 이 칭호는 그분이 우리 주님임을 모두 고백하는 신앙의 고백이다. “우리 주”라는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로 고백하는 행위이다. 어떤 인간도 주님이 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주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고백을 매주, 매일 고백하여야 한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마치 군대에서 상관을 만날 때마다 인사로 충성을 외치는 것과 같다. 사람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조물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려면 우리를 지으신 바로 그분을 우리 주님으로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 중에 입으로는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우리의 행동으로는 부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사실상 신앙고백이 아닌 것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을 즐겨 따르며 충성을 다해 섬기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표현하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분을 부른 칭호들 중 대표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요 20:28, 고전 16:22)
답:
신약에는 예수님께 적용된 다양한 칭호가 나온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셨으나 인자(人子) 또는 메시야로도 불리셨다. 그분께서는 주님(Lord)으로 아주 많이 불리셨다. 이 단어는 본래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로마 황제는 자신의 신격을 주장하면서 '주'(主, Lord)로 불리기를 원했다. 로마의 가이사가 아닌 그리스도를 최고의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생사가 달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로마 영토 내에 사는 자들은 오직 하나의 쿠리오스(Kyrios, 주)만을 가져야 했으며, 이 칭호를 황제 외에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고문과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主)로 부르는 데는 믿음과 헌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으로 부르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만약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면 그분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포함한 온 삶의 주관자가 되셔야 한다.

2.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를 때 그 진실성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요소는 무엇입니까?(마 7:22-23, 눅 6:46)
답: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부르고 그분께 믿음과 사랑과 충성을 고백하는 것과, 진실로 그렇게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대한 우리의 충성심이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은 7:23에 나오는 죄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면 그분의 율법에 순종할 것이다.(요 14:15)

교훈: 로마 시대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오늘날 우리도 진정으로 주님을 부르려면 전적인 순종이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主)님을 위해 사는 존재라고 말한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 말을 자주 들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그런데 1세기 로마 사회의 정황을 고려하면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은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쉽게 부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다. 1세기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던 사람들이 ‘주’(헬라어로 ‘큐리오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로마의 시저(=가이사)였다. 시저에게만 공적으로 주라는 칭호를 붙이며 존경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1세기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로마법에 따라 사형을 당해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그를 위해 죽는 것도 영광스럽게 여겼다. 크리스천들의 이런 태도는 더 이상 시저를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심각한 죽음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거의 위험을 느끼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고 부르기도 하는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1세기를 살던 믿음의 선배들의 고민과 결단에 동참할 수 있는가 우리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고백에 가슴이 뜨거워질 수 있도록 오늘도 일터에서 노력하자. 그런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한다.

금요일(6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시대의 소망, 제14장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132-143)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에 대해 교훈을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나라의 원칙과 일치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신 후 그 어린아이를 팔로 친절히 안으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함, 자기 부정, 신뢰하는 사랑은 하늘이 가치 있게 여기는 속성들이다. 이 속성들이 진정한 위대함의 특성들이다.”(시대의 소망, 436-43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까? 그러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2. 새 신자가 그리스도의 훌륭한 제자로 성장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제자가 된다는 것이 단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것 이상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자신의 영광과 칭찬을 더 많이 추구하고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더욱 힘쓰는 우리의 죄 된 속성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을 어떻게 방해합니까?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요약: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든지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굳건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자발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역경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아를 기꺼이 죽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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